허영선 시인·논설위원

   
 
     
 
31년 만이었다. 남의 나라에서 모국의 비애를 노래했으나 우리말로 그 시가 빛을 보게 된 것은. 한국어를 모어로 뒀으나 일본어로 독보적인 시를 쓰는 재일시인 김시종. 80년대 초 우여곡절, 일본어로 나올 수 있었던 이 시집, 「광주시편」은 일본에서 모두 1만여권이 팔려나간 시집이다. 광주 5·18재단이 「광주시편」을 번역(김정례) 출간하고, 그 기념회를 연 것은 2014년이 가기 전이었다. 그 자리에 오사카의 시인은 비록 참석하지 못했으나 나는 보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 기억을 응축하는 시인의 영상 속 모습을.

「광주시편」엔 당시 광주엔 없었으나 그가 한 시기를 보낸 광주, 다만 천둥소리만 들었어도, 비통해 하던 시인의 마음이 스며 있었다. 그의 시 '먼 천둥'에 끌렸다. '볶은 콩을 담으면서 그저 코만 훌쩍이고' 계시던 당신의 어머니와 '갓 세탁한 속옷을 어머니께 받았던' 광주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대학살의 시대를 떠올렸을 시다. 4·3대학살의 와중에 홀로 더 이상의 작별을 꿈꿀 수도 없었던 부모를 두고 제주도를 떠난 시인. 그에게 "제주는 어머니의 땅이고, 광주는 사춘기의 땅"이었으니.

새해 벽두 시인의 자서전이 다음 달 일본 이와나미서점에서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재할 때의 제목은 '바야흐로 꼬부랑길'이었으나 '조선과 일본을 산다'란 이름을 달고 나올 듯하다. 거기엔 아직도 4월 제주엔 가고 싶지 않다던 시인이 제주4·3을 관통했던 스무살 언저리의 기억이 구비칠 것이다. 기어코 1949년 슬픈 제주바다를 건넌 이후, 그는 조선과 일본을 산다.

삶의 길은 여러갈래. 저마다의 길을 간다, 그 길은 누군가에게는 꼬부랑길이었다. 시인 김시종의 길은 꼬불꼬불 '꼬부랑 길'이었다. 허나 그 길은 돌아보니 한 줄기였다.

일제 식민지 지배, 해방. 누군가에게 해방은 환희였고 이별이었다. 그로 인한 분단. 뒤틀리는 운명의 이 섬을 떠나야 했던 젊은 시인. 두개의 시선으로, 대폭압의 시대를 견뎌야했던 경계인. 어느 생인들 안 그러랴만, 시인의 생 역시 한국근현대사의 큰 줄기다. 그 시인의 일본어는 거친 맛이지만 어쩐지 그가 책을 낼 때마다 일본 출판계와 독자들은 주목한다. 노시인의 70년 꼬부랑 길을 돌아보는 일은 제주를 떠나야 했던 재일의 역사를 성찰하는 길이다.

올해는 2차세계대전 종전 70년, 일본 패전 70년, 분단 70년, 역사의 해다. 해방 이후 알게 모르게 외상을 겪었던, 겪어야만 했던, 겪고 있는 재일의 초상은 우리 역사의 과거이며 미래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그들을 기억하고 있는가. 재일의 그들은 일본 정부의 가혹한 차별과 탄압에 저항하고 비탄에 빠지면서도 희망의 단서를 놓지 않았다. 그 가운데 더 특별하고 격한 생을 살아온 존재들, 바로 재일제주인이다.

분단 70년! 그 한 줄기엔 화염의 제주4·3이 떠다니고 있다, 이 시인처럼 4·3으로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제주섬을 떠나야 했던 젊은 그들이 어디 한둘이랴. 일본 땅에서 자신의 뿌리조차 숨죽이며 살아야하던 이들도, 사무치는 고향의 대학살을 '먼 천둥'으로 들어야 했던 이들도 있다. 살아남은 자들은 마침내 2014년 4·3이 국가추념일로 지정되자 누구보다 감격해 했다.

분단 70년 을미년 벽두. 도민들은 물론 누구보다 통일을 염원하는 재일을 사는 이들의 가슴이 아리다. 덕담으로 시작돼야 할 제주섬에 4·3평화공원의 위패를 가려내려는 '4·3희생자 재심사' 논란이라니! 잊을만 하면 폭풍처럼 되살아나는 이 파문 앞에서 생각한다. 국가란 무엇이고 정권이란 무엇인가를. 한 정부 관료의 뜬금 없는 소리에, 갑자기 역사의 시계추가 거꾸로 가는 느낌이다. 화해와 상생을 외치며 여기까지 왔다. 4·3특별법의 과정을 따라, 숱한 꼬불 길을 따라 4·3은 여기까지 왔다. 이 소모적인 논쟁은 과감히 마침표를 찍자. 분단 70년 통일을 '꿈같은 일' 로 생각하는 노시인의 노래는 계속되고 있다.

아직도 4·3은 해야할 일이 많다. 바야흐로 4·3을 제대로 정리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길,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통일운동 아닌가.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