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성 독립운동 열전] 5. 고연홍·이갑문·탁명숙·현호옥

▲ 광주 3·1운동으로 투옥됐다 출옥 후 찍은 기념사진. 앞줄 왼쪽 첫번째가 고연홍이다.
광주·서울 등서 3·1운동 참여 후 옥고 치러
유공자 지정 '제자리걸음'…연구 작업 시급
 
▲ 탁명숙
▲ 이갑문
일제의 무자비한 총칼을 목전에 두고도 당당히 맞선 제주 여성들이 있다. 학생이자 간호사, 여공이었던 이들의 용기로 조국이 독립을 맞이했지만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하면서 후손들의 기억에 조차 남지 못하고 있다.
 
일본 동경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 운동과 고종의 서거로 촉발된 3·1 서울 학생 투쟁은 조국 독립에 대한 전 국민의 열망을 터트리는 기폭제가 됐다.
 
전남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제주 출신 고연홍(1903~?)은 당시 교사였던 박애순의 "만국 강화회의에서 조선도 독립을 승인받았기 때문에 각처에서 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이므로 우리도 그 운동을 개시하고 조선 독립 만세를 불러야 한다"는 말에 태극기를 손에 쥐었다.
 
이렇게 1919년 3월10일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학생들과 종교인, 시민 등 1000여명에 의해 '광주 3·1 운동'이 발발했다.
 
학생들은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줬으며, 시위 대열에 합류해 목을 놓아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짖다 체포돼 재판에 회부됐다.
 
광주 3·1 운동에 참가해 재판에 회부된 독립운동가 48인의 재판기록은 90년만인 지난 2009년에야 공개됐다.
 
'고연홍(高蓮紅) -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1월'이라는 기록이 세상에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독립운동가로 기억되기 시작한 것이다.
 
서귀포 중문 출신의 이갑문(1913~?) 역시 사립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의 학생으로서 일제에 저항했다.
 
1931년 7월 발생한 '만보산 사건'을 구실로 만주를 점령한 일본에 대해 격분한 이갑문은 '전조선 혁명적 학생들에게 격 함'이라는 격문을 몰래 학교에 살포했다. 이후 이 일이 탄로 나면서 용산경찰서에 검거돼 이갑문은 1932년 7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 위판으로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4년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서울 남대문 세브란스병원의 간호사 탁명숙(1893~1972)은 1919년 3월1일 거국적인 만세 운동이 발발하자 시위에 참여해 여성들을 지휘하는데 앞장섰다.
 
나흘 뒤인 5일 밤에는 각 학교 학생 대표 63인과 시위 대책을 논의하던 중 일제에 발각돼 체포됐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강우규 의사를 숨겨주다 다시 체포됐다.
 
계속되는 옥고에도 불구 탁명숙은 중국으로 넘어가 김구·이승만·이동휘·여운형 등의 애국자들과 만나 지속적인 항일 운동을 펼쳤으며, 광복 후에는 4·3사건으로 의지할 곳 없어진 도내 고아들을 모아 키우며 제주의 '마더 테레사'로 불렸다.
 
노동운동을 벌이며 일제의 부당한 탄압에 저항한 현호옥(1913~1986)은 일본에서 중학교 야간부에 다니며 자전거 공장 여공으로 일했다.
 
1933년 2월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화학노조 오사카지부의 회원이 된 현호옥은 메이데이 등 각종 노동운동을 통해 일제에 투쟁했다.
 
이후 1934년 체포된 현호옥은 1935년 10월 오사카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 바쳐 독립을 쟁취해 냈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점이다. 또 지난 2013년에 추서된 탁명숙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같다.
 
어찌 보면 이들에게 더 무서운 것은 일제의 총칼보다 역사에 조차 기억되지 못한 채 잊혀져 가는 것이다. 제자리걸음에 머물고 있는 이들에 대한 연구와 '기억 작업'이 시급한 이유다. 고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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