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휴 전 초등학교장·논설위원

   
 
     
 
버스를 탔다. 자리가 없어서 통로에 서 있는데, 차 안에 가득 찬 아기 울음소리. 맨 뒷좌석에서 한 아주머니가 아기 둘을 안고 쩔쩔매고 있었다. 승객들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버스가 멈춰 섰다. 정류장도 아닌데 웬일인가. 슈퍼마켓 앞이다. 기사 아저씨가 문을 열고 점원을 소리쳐 불렀다. "아가씨, 저기 앞에 있는 막대사탕 하나 주세요" 어이가 없었다. 안에서는 아기울음이 귓전을 때리는데 차를 세워서 사탕이나 사다니…! 다시 운전석에 앉은 아저씨가 큰소리로 외쳤다. "어이, 거기 서 있는 학생! 잠깐 이리 와 봐요" 나를 부르시나? 쭈뼛쭈뼛 다가가니 아저씨가 씨익 웃으며 사탕을 내미셨다. "저기 뒤에 우는 애기한테 사탕 좀 주고 올래요?" '아, 그랬구나!'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아기에게 달려가 사탕을 쥐어주었다. 사탕을 입에 문 아기는 이내 울음을 그쳤고 아주머니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를 되풀이했다. 승객들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사탕 하나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 기사 아저씨가 정말 멋있었다.[하용훈(부산시 수영구), 2004. 6. 「좋은 생각」에서 간추림]

버스를 타면 편안하다. 계절 따라 변하는 창밖의 풍경도 눈을 즐겁게 한다. 피곤할 때에는 잠도 즐길 수 있으니 그 아니 좋은가. 나는 평화로와 5·16도로 노선을 하나로 잇는 아이디어를 내신 분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780번 노선이 2012년부터 제주시와 서귀포를 동·서 양쪽으로 한 바퀴를 빙 돌게 되면서 통학생들이 아주 편리해지게 되었다. 가령 창천·중문·신서귀포 등지는 물론이고 멀리 유수암에서도 5·16도로에 있는 서귀포산업과학고등학교를 단 한 번의 승차로 등하교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학생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마찬가지다. 교통카드를 시간 맞춰 이용하면 '환승의 혜택'까지 보게 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제주의 시외버스는 택배역할도 수행한다. 버스 편에 소포를 보내고 나서 받을 사람에게 버스시간을 알려주는 것만으로 거의 정확한 시간에 어김없이 주고받을 수 있으니 정말 편리한 택배인 셈이다.

그런데 며칠 전 일이다. 제주시에서 동회선 버스를 타고 느긋하게 눈을 감고 반쯤 졸면서 오는데 이상한(?) 영어안내가 들렸다. "디스 스탑 이스 준갱로더리" 준갱로터리? 그게 어디지? 눈을 떠보니 버스는 바야흐로 서귀포 시가지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하, 원어민이 'Jungang rotary'를 '준갱로더리'라고 했구나. 혼자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Jungang rotary'를 'Jung-ang rotary'라고 썼다면 바르게 읽지 않았을까. 또 있다. 제주시에서 평화로로 나오다 만나는 무수천(無愁川)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의 계곡. 그런데 이곳을 지나다보면 안내판에 한글과 더불어 'Musucheon-Riv'라고 표기돼 있음을 본다. 'Riv?' 얼른 생각하면 'River'는 물이 흐르는 강(江)이 떠오르지만, 사실은 'Rivulet'(개울·시내)를 말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Riv'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Rivulet'보다는 'River'를 떠올리게 할 것이다. 차라리 'Brook'나 'Stream', 아니면 'Creek'나 'Rill' 정도가 알맞지 않을까. 제주도의 버스 정류장 안내판에는 또 다른 아쉬움이 있다. 제주어 표기문제다. 내가 사는 신서귀포 시내버스 정류장에는 '고래왓'이란 곳이 있다. 나는 이곳에 20년 넘게 살면서도 그 고래왓을 바다의 고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정도로 무심히 지나쳤다. 하지만 최근에야 그게 바다의 고래가 아니고 맷돌을 말하는 '가래'임을 생각해냈다. 이렇게도 둔할 수가! 스스로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그냥 웃어버리기엔 뭔가 찜찜한 게 있다. 고래왓. 이걸 '맷돌을 만들었던 지역(밭/왓)'이라고 읽어낼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제주어에만 남아 있는 '아래아'가 제주에서조차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고래는 가래로, 수모루는 수루로 원음대로 적으면 안 될까. 제주어를 연구하는 분들이 고민해줬으면 좋겠다.
꽃 피는 4월이 되면 아내와 함께 버스를 타고 제주도 이곳저곳을 두루 살피면서 즐거운 봄나들이나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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