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환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

며칠 전에 삼성신화의 흔적을 돌아보러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를 찾았다. 이 마을은 제주시의 삼성혈과 관련성 때문에 관광객들에게 관심이 큰 곳이다. 
 
바닷가로 들어서자 혼인지 마을의 유래를 설명하는 표지판이 있다. 처음에는 삼성신화와 거의 다름없이 진행되는데 자칫하면 점점 내용이 방문객들에게  오해를 일으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혼인지(婚姻池) 명칭이다. 이는 혼인한 연못이라는 뜻으로 보면 혼인지(婚姻池)가 맞다. 
 
하지만 조금 떨어진 굴에서 신방을 차렸다는 점을 더해 보면 혼인을 한 터라는 의미의 혼인지(婚姻址)가 옳을 듯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차를 타고 이곳을 찾아가면 입구에서부터 이 두 가지 명칭이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온평리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횐죽 또는 흰죽이라 불렀다는데 이제는 이런 이름을 알고 있는 젊은이가 드문 것이 사실이다. 한자어를 고급언어로 생각하면서 순우리말은 사라지고 있는 형국이다. 
 
둘째는 '열운이'라는 마을 이름이다. 1991년 온평리에서 펴낸 마을지에 따르면 온평리는 행정구역상 명칭이며, 열운이는 오래전부터 그곳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이다. 
 
고문서에서는 열운이라는 소리에 맞춰 열운이(烈雲伊), 열온이(烈溫伊), 열혼포(烈婚浦) 등으로 유사한 문자로 나타난다. 
 
이형상 목사는 탐라순력도에서 영혼포(迎婚浦)로 남기고 있다. 이 외에도 고양부 삼신인이 이곳에서 혼례를 치렀다 해 예혼(禮婚)이라 하는 명칭도 보이는데 이것은 음의 변모를 거치면서 예론 또는 열혼, 여을온, 열운이라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결국 온평리는 온화하고 평화롭다는 의미로 남지만 열운이는 사라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세 번째는 내용의 변모양상이다. 삼신녀가 궤짝을 타고 와 육지로 첫발을 내디디면서 남긴 흔적으로 말발자국과 고무신자국이 선명하며 또 바로 옆에는 삼공주가 목욕재계한 선녀탕이 있다. 
 
이것은 증거물이 있어야 전설이 생명력을 갖기에 이처럼 표현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억지춘향 격임을 부인할 수 없다.
 
선녀탕 모티브는 다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설사 있다고 해도 연못에서 혼인했다고 하여 혼인지(婚姻池)라 불리는 것과 선녀탕은 충돌된다. 
 
또한 고무는 18세기에 지우개로 처음 사용했고, 우리나라에는 1920년을 전후해 고무가 들어오고 그때부터 고무신을 만들기 시작했기에 고무신자국이 남아 있음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신화적 사고의 틀을 깨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더 나아가 표지판 끝에는 사신과 같이 왔던 거북이는 돌아가지 않고 온평리를 지키고 있다며 고문서에 없는 거북을 등장시켜 마을의 행운을 빌고 있다. 
 
요즘 스토리텔링이 대세이지만 이처럼 자료적 가치보다 응용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버린다면 제주에서 보존해야 할 조상의 흔적은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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