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휴 전 초등학교장·논설위원

"혹시 ○○○이란 사람을 아십니까?" 파출소에서 걸려온 전화  였다. 아마 1968년도쯤이었을까. 당시 서귀포 시내 어느 학교에 근무하면서 숙직을 하던 밤, 운동장과 골마루를 한 바퀴 돌아본 다음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참이었다. 얼른 생각이 나질 않았다. "글쎄, 잘 모르는 사람 같은데요" "예, 알았…" "잠깐만요! 그 사람과 통화를…" "삐~삐~" 전화는 벌써 끊겨 버렸다. '이상하다. 누구지?' 나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이내 잊어버렸다. 그런데 그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가 될 줄이야.
 
퇴직 후 교직생활을 되돌아보던 중 많은 제자가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중에는 몇 십 년 전 숙직 중에 얼핏 들었던 이름도 들어 있었다. '아, 그때 전화로 들었던 그 이름이 바로 초임시절 내가 사랑했던 제자였구나!' 가슴을 쥐어짜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는 가난했다. 몸은 조금 불편했지만 성격은 밝았다. 글짓기에 소질이 있어서 가끔 생각 깊은 글로 가슴을 울려주던 그런 아이였다. 이따금 자취하는 필자 방에 친구들과 함께 놀러 와서 즐겁게 놀다가곤 하던 그 아이, 그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했다니!  멀고 먼 모슬포에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물어물어 찾아왔을, 초임교 시절의 애제자. 그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모른다고 했으니! 순수한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긴 셈인가. 나는 정말 '무정한 선생'이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재작년 5월, 바로 그 학교 52회 졸업생들 중 신사 숙녀 7~8명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대정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가르쳐준 담임선생님들을 졸업 50주년 스승의 날에 초대한다는 것이었다. 대견하고 고마운 일이다.
 
한 호텔에 모인 '선생님'들은 모두 일곱이었다. 분수에 넘치는 '감사의 말씀'과 접대에 선물까지 받았지만, 필자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정말 이런 대접을 받을 만큼 아이들을 사랑해주었는가. 몇 번을 되새겨 보아도 그렇다는 대답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제자의 이름마저 기억해내지 못했던 필자는 늦었지만 가까이 근무했던 교직동료들이라도 잊어버리지 말자고 교원수첩을 보면서 가끔 현직에 있는 선생님들에게 전화를 하곤 했었다. 그런데 2012년부터는 그마저도 어렵게 돼 버렸다.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교원수첩 발간도 중단됐으니 이제는 안부전화를 하려 해도 바뀐 전화번호를 알 수가 없다. 기다리기 전에 내가 먼저 전화를 해야 하지만 그럴 수도 없게 된 셈이다. 
 
퇴임한 사람들은 현직에 있는 젊은 분들과 자주 접촉을 해야 굳어가는 생각이 유연해질 것이고, 지난날의 잘못이나 실수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야 뒤늦게 깨닫는다고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하면 대답할 말은 없다. 하지만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논어)'고 하지 않았는가. 
 
필자는 킴벌리 커버거가 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詩) 제목을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운 지난날을 되돌릴 수 없음이 안타깝다. 
 
시의 내용 일부를 내 멋대로 수정해서 웅얼거려보기도 하지만 그 역시 허전하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아이들 사랑에 더 열중하고/…모든 아이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내가 만나는 아이들을 사랑하고/나 역시 그들에게 신뢰할 만한 교사가 되었으리라." 
 
정말 미안하구나. 그런데 미안한 게 어디 그 아이 뿐이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도움을 바라는 신호를 보냈는데도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그때 그 아이들은 얼마나 섭섭하고 안타까웠을까. 지금 다시 그 아이들을 만나고 그들이 내게 그런 신호를 보내온다면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말고 잘 알아차리고 들어주고 도와주고 함께 울고 웃어보련만…. 
 
창밖의 5월 하늘은 염치없이 너무 푸르고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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