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주 봉성교회 목사·논설위원

이슬람국가(IS)의 세력이 아랍세계에서 점령지역이 늘어간다는 보도를 접할 때 언뜻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카르툼'. 아랍어인데, 그 뜻은 상아이다. 백나일과 청나일이 합쳐져서 나일강의 본류를 형성하는 모양이 코끼리의 상아처럼 생겼다. 여기에 수단의 수도가 자리잡았다. 
 
1885년, 카르툼을 놓고 처절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이슬람의 지도자 마흐디와 영국총독 고든이 그 주역이었다. 연전에 이 사건에 대한 책이 우리 글로 번역 발간됐는데, '대영제국 최후의 모험'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페이잘 왕자는 로렌스를 처음 만났을 때 말한다. "자네도 사막을 사랑하는구만, 예전에 카르툼의 고든도 그랬지. 우리들은 나무와 풀이 좋은데" 처칠은 로렌스를 매우 소중한 영국인으로 경애했다.
 
아랍에서는 그의 이야기를 허황된 소설이라고 폄하한다.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산신제에서 초헌관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개인의 선택이나 불편함을 접어두고, 도민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당연히 공무로서 수행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있었다. 
 
공인으로서의 역할과 개인의 사적인 신앙의 영역을 구분하고,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지 못했다는 지적이었다. 제주문화와 전통 그리고 민심과 거리를 둘 때에 생겨날 수 있는 서운함을 느끼는 민심을 고려해야 한다는 충고도 있다. 도정을 이끄는 입장에서 어느 쪽이 과연 유익한지 판단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정일치와 정교분리, 이 중 어느 것이 전근대적이고 혹은 개화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쉽지 않다.
 
이른바 선진문명국가들은 지금 사회붕괴나 문화적인 공황상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기에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 지사가 보여주는 행보는 제주사회가 넘어서야 할 작은 장벽을 돌파하는 것이라 보고 싶다. 개인의 신앙양심을 고려하지 않고서 강요된다면, 그 제례의 의미와 효력은 무엇인가.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돼 청문회 절차를 앞두고 있는 황교안 법무부장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비판의 소리들이 들린다.
 
먼저 한국사회 주류집단의 마지막 보루라고 자처하는 입장에 대한 질문이다. 냉전시대의 진영논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권력자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불안한 민심을 조장하고 허상과 조작으로 오도하는 사회에서 건전한 발전은 이뤄질 수 없다.
 
더구나 특권층으로 존중받기를 원하면서도 이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은 회피하거나 방기하는 태도는 경멸받아 마땅하다. 병역과 납세 등 기본 의무에 대한 몫을 제대로 지지 않았다는 비판을 묵살할 수 있는가.
 
또한 개인의 신앙 혹은 가치관을 국법이나 사회질서보다 더 우위에 둔다는 지적도 있다. 원 지사나 마찬가지로 황 후보자도 개신교도이다. 평신도이긴 하지만 신앙적인 열정과 일관성 있는 언행은 성직자의 수준에 이르고 있다고 본다.
 
그러기에 간혹 표출된 후보자의 생각은 무척 당황스러운 것들도 있다. 
 
우리 현대사가 흘러온 그대로가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했던 어느  후보도 논란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네팔 지진으로 인한 난민들을 구호한다고 찾아간 어느 봉사자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만난 재앙이라고 말하면서 선교의 기회로 활용하려 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어려움을 만날 때 잘못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은 나와 우리를 향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남을 향해 그런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는 결례가 되며 아무런 효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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