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호 전 애월문학회 회장·시인·논설위원

오월이 지나 유월이다. 연두빛 신록의 이미 저리가 신선하다고 한다면 초여름의 짙푸름은 열정이 아닐까. 봄이 아닌 듯 봄은 가고 여름은 본격적으로 그의 완력을 휘두를 채비를 하고 있다. 오일장에는 벌써 매실이며 노란 참외, 토마토 등 여름과일이 풍성하다. 저처럼 우리 삶도 순도 높은 색과 당도 높은 맛이었으면 하는 푸념을 하여본다. 
 
오월은 가정의 달이다. 평소에 무심했던 아이들의 소중함을 깨우치고, 부모와 스승에 대한 은혜를 생각하고, 부부의 좋은 관계에서 가정의 행복이 비롯되기에 특별한 날로 제정했을 터이다. 
 
실은 날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로 산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불행이도 사람의 마음은 수시로 변하고, 본능적 욕구는 끝이 없기에 삶의 갈등과 고달픔은 가히 운명적이라 할 것이다. 또 한편으로 삶의 애환과 애증, 고락이 있기에 극복하며 애써 사는 이유가 되고, 살맛이 있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오늘의 우리사회와 가정의 현실은 거대한 쓰나미를 예감하듯 위태롭기 그지없다.
 
찰스 스윈돌(신학자·1934~)은 문화가 붕괴되기 직전에 나타나는11개의 전형적인 패턴이 있다고 했다. 그 중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들로는 이혼의 급증, 자녀수의 감소, 부모 멸시, 결혼의미의 퇴조, 간음과 성도착의 보편화, 청소년의 비행과 폭력화 등이 있다. 매스컴에서 우리가 날마다 접하는 것들이다. 그 시대 그 문화가 붕괴될 때마다 그에 앞서 가정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통일신라가 그렇고, 로마가 그렇다. 가난해서가 아니라 풍족한 가운데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병든 사회, 그것도 무너지기 직전의 중증인 사회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기 암이 모르게 오듯이 다만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사회학자들은 가정이 해체되고, 가정이 무너지고 있는 현상을 병든 문화의 말기적 증세라고 진단하고 있다. 건강한 사회, 건강한 문명의 바로미터는 건강한 가정이라는 것이다. 이 사회의 모든 지표는 경종을 울리고 있지만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 없이 파탄의 건널목을 건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쇼펜하우어는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좀처럼 생각하지 않고, 없는 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을 만들어 낸다'고 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중요시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인가.
 
사람들의 대부분은 돈이나 명예, 사회적 지위 등을 애타게 추구하면서 목말라 한다. 그러면서 정말 소중한 것들에 대해서는 거의 무의식에 가까울 정도로 무심하다.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비극이 아닐까. 만일 우리의 일상에서 한 걸음만 물러서서 보면 평소에 잊고 지내던 나의 가정과 가족이 우리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임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허공이 있다'고 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공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늘 목말라 하는 이유가 이 허공 때문이며 사람들이 동분서주하는 이유도 텅 빈 이 허공을 채우려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멀리 있지 않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행복의 파랑새'가 바로 창문 앞 살구나무가지에 앉아 울고 있듯이 밖으로 향한 눈을 내게로 돌리기만 하면 금방 이 허공을 채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봄날은 가고 가정의 달도 가고, 그렇게 우리의 날도 갈 것이지만 '나는 가족들에게, 또 우리 이웃들에게 어떤 사람일까'를 더 늦기 전에 깊이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예전 제주도에는 대부분의 마을들이 바닷가에 편재해 있었다. 그것은 갯가마다 맑은 샘물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밀물이 되어 짜고 지저분한 물로 덮여 있어도 샘물은 여전히 맑은 물을 뿜어낸다. 그게 사랑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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