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언 할아버지가 말하는 물통

▲ 80평생을 서귀포시 서홍동 지장샘 인근에서 살았다는 오태언 할아버지. 김지석 기자
첫 허벅 남편 험담 져나르고
두번째 허벅 시댁흉도 보고
세번째는 자식 자랑도 하고

"그게 뭐가 있었나. '말'이 많았지. 거기서는 너도 나도 말이 많아졌어. 사는 것 같았지"
 
80 평생을 서귀포시 서홍동 지장샘(智藏泉) 인근에서 살았다는 오태언 할아버지(82)에게 지장샘은 '인생 지침서'였다. 물이 귀하다는 사실도, 마을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유도 다 지장샘에서 배웠다.
 
"식수로 썼으니 더 뭐가 있겠어, 누구는 냉장고로도 썼고 빨래터에 노천 냉탕에 이 것 저 것 쓰임이 많았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장샘만큼만 살라'는 말이 그냥 나왔을 리 있겠냐"는 오 할아버지의 입가가 슬그머니 올라간다.
 
모든 게 힘들고 불편했던 시절이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수도'구경은 쉽지 않았다.
 
"아침이면 어머니가 물허벅을 지고 나갔어. 동네 아주머니들도 하나같이 물허벅으로 물을 길어 날랐지. 대 여섯 번은 오가야 집 항아리를 채웠어. 그냥 오간 게 아니야. 첫 허벅에는 남편 험담을 져 나르고, 두 번째 허벅에는 시댁 흉도 보고, 세 번째는 자식 자랑도 하고 그랬지. 점점 말수가 줄어들어. 그럼 슬쩍 눈치를 보지. 오늘 어머니 기분이 어떤가 하고"
 
지장샘은 '마을 공동 방앗간'역할도 했다. 지장샘에 연결된 몰고래(연자방아)는 아직 그 일부가 남아 있다. "이 일대가 '논'이었어"하는 오 할아버지의 손 끝 방향으로 반듯한 회색 건물이 보인다. 아파트다.
 
오 할아버지는 "아침 저녁만 아니면 뒷동산 '가시머리'와 여기가 놀이터였다"고 했다. 아침은 어머니들, 저녁은 동네 어른들에게 우선 순위가 돌아갔다. 광복에 4.3, 6.25한국전쟁 등 시절이 하수상할 때도 이 곳에서만은 너나없이 마음이 편해졌다.
 
"처음엔 차갑다고 발가락만 까딱거리지. 물싸움으로 번지는 것은 금방이야. 다 벗고 놀아도 창피한 줄 몰라. 옷이 젖어도 볕 좋은 곳에 잠깐 서 있으면 말랐어. 한 참 놀다 배가 고프다 싶으면 참게도 잡아 구워 먹고…" 다 어제 일만 같다.
 
마을과의 끈끈한 인연만큼 지장샘에 얽힌 전설도 묵직하다. 고려 예종때(1110년경) 탐라에 장차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을 두려워 한 중국 송나라 왕이 압승지술이 능한 호종단을 보내 십삼혈을 모두 막으라고 시켰다. 그때 농부가 숨겨 놓은 물 하나를 찾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말랐던 샘은 다시 솟았다. 그 현명함을 기려 지장샘으로 불렀다. 김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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