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호 전 애월문학회 회장·시인·논설위원

국내·외에서 사람들이 제주도로 몰려오지만 토박이인 필자는 그 유명한 올레코스를 한 코스도 체험하지 못했다. 굳이 이유라고 한다면 '오몽(제주어로 움직임)'하기 싫은 게으른 성격 탓이리라. 그런데 지난달 지인 몇 명이 추자도에 다녀왔다. 특별한 목적도 없이 다만 무료한 삶에 생기를 불어넣고 싶어서였다. 추자도에는 3년전 굴비축제기간에 제주문인협회의 문학기행으로 참여한 적이 있지만 피상적이었다.
 
추자도는 제주에서 45㎞ 북쪽에 있는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로 된 군도라는 것, 인구 2000여명이 주로 어업에 종사하는 작은 섬이라는 개연적인 정보와 작은 산들과 아기자기한 해안선이 아름답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기억이 없다. 적어도 그 지역을 관심 있게 살펴보려면 아무래도 그 곳 주민들과 교류하면서 문화와 전통을 체험하지 않고는 수박 겉핥기가 되기 쉽다. 그러나 이번 추자도 기행은 달랐다. 외고 K교사의 절친인 추자면 주민자치위원장 L씨를 만났고, 그와 친분 있는 몇 분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L씨는 최영 장군의 사당을 기점으로 올레18-1코스 약 18㎞를 안내하면서 추자의 자연과 역사와 전통을 자상하게 설명해주었다. 더구나 저녁에 몇몇 마을유지와 술잔을 기울이면서 추자의 정서를 느껴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추자도 사람들은 순박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 했던가. 어느 사이에 우리 일행은 그들과 마치 죽마고우인 듯 흉허물이 없는 사이가 됐다. 그러나 돌아오는 배 안에서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마치 오래 묵은 체증 같이 나를 우울하게 한 것은 본도 사람들이 추자도를 무시하고 차별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해일 수 있다고 변명했지만 제주항에 입항할 때까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추자도는 1914년 이전까지 전라남도 부속도서로 편입돼 있었다. 지리적으로 완도와 가깝고 언어와 문화도 비슷해서 심층적으로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연전에 전라도가 추자도의 소속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을 때 일부 주민들은 은근히 전남에 예편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는 불에 대인 것처럼 화들짝 나의 무의식 속을 둘러보았다.
차별, 이보다 쓰리고 서글픈 말이 또 있을까. 가까운 예로 우리는 일제강점기 36년간을 나라를 잃고 일본인들의 압제와 능멸을 견디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반성을 모르며, 재일본 60만 동포들은 여전히 유랑민들로 허공을 떠돌고 있다. 일본에서 목회 50여년의 K목사의 얘기로는 일본의 차별정책과 일인들의 혐오의 시선은 갈수록 노골화되고 있으며 귀화하는 교민이 연간 1만여명이 된다고 한다. 그들은 귀화해 취업과 사회복지의 혜택을 받을 수는 있지만 대부분 3D업종에 종사, 멸시와 천대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사람이 사는 사회에는 갈등과 차별이 있어왔으며 우리사회라고 별로 다르지 않다. 예서부터 편 가르기에 능하고 차별정서의 골이 깊다. 
 
특히 제주도는 작은 섬인데다 경제적 문화적으로 소외지역이어서 더욱 그랬다. 필자가 입대했을 때만해도 소수인 제주출신은 '제주똥돼지'라고 대놓고 멸시를 당했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제주도가 가보고 싶은 곳, 살고 싶은 곳 제 1호로 부러움을 사고 있다니 감회가 새롭고 가슴 뿌듯하다.
 
추자도는 우리가 품어야 할 숙명이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이 제주도민이란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혹여 본도 주민들이 갑의 시선으로 추자도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 돌아볼 일이다. 추자도는 결코 낙후된 부속도서가 아니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심층적 선입관이다. 우리는 입으로는 총화를 말하면서 마음의 문은 좀처럼 열지 않는다.  본도 사람들의 마음에 45㎞의 거리를 해소하지 않고서는 행정구역으로는 몰라도 영영 제주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깊이 새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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