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희 생활경제연구소장·YTN 객원 해설위원·논설위원

경영권 분쟁으로 비화한 롯데가 승계 문제는 왠지 낯설지가 않다. 데자뷰(旣視感·deja vu)마저 느낀다. 장남과 차남이 경영권을 두고 다툰다. 그룹은 각각 두 사람을 지지하는 가족들과 가신으로 나뉜다. 총기를 잃은 창업주 아버지는 몇 년 되지 않은 시차를 두고 둘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경영권 분쟁은 지주회사의 주주총회로 끝나기는 커녕 소송 같은 장기전으로 비화될 조짐이 역력하다. 장남과 차남, 가족과 가신 그룹 모두가 공멸의 위기감에 휩싸이기 전까지는 중재와 타협의 여지도 없다. 어느 한 쪽이 이기면 다른 쪽이 파멸하는 '승자독식' 상황이다.

그렇다. 재벌 일가를 무대로 한 드라마에서 항상 보는 대립 구도다. 그러나 이런 막장 드라마에서 조차 다툼은 대개 배 다른 형제 사이에 벌어진다. 같은 어머니를 둔 형제들간 분쟁이 아니다. 이 대목에서 바로 출생의 비밀이라는 막장의 핵심 요소가 등장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롯데가 사태는 막장 드라마보다 더한 드라마적 요소로 국민을 경악케 했다. '피가 물보다 진할지는 모르지만, 돈은 확실히 피보다 더 강하다'

얼마전 삼성물산 합병 논란으로 국민의 관심을 끌었던 삼성그룹의 경우 막장 드라마다운 요소는 없었다. 3세가 자신의 지배구조를 확고히 하려던 것뿐이었다. 기껏해야 하필이면 오너인 아버지가 와병(臥病)중인 상황에서 그래야 했느냐고 비난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삼성은 20여년에 걸친 승계 과정의 문제가 있다. 3세는 처음 주당 7700원에 발행된 전환사채 48억원어치를 오늘날 1000배 이상의 가치로 부풀렸다. 그것도 실질적 지주회사 삼성물산의 지분으로 만들어 그룹의 황제 자리에 등극했다. 그 과정은 지극히 용의주도했다. 돈을 얼마 들이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사실상 승계를 마무리 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재벌보다도 경제적이었다. 전환사채 헐값 발행 논란은 무죄 판결이라는 면죄부까지 받았다.

롯데와 달리 완전무결해 보이는 이 과정이 문제라면 문제다. 편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묘한 줄타기를 하며 지나칠 정도로 영악하게 구는 이 방식에 국민들이 질려서다. 승계  마무리 과정의 일환으로 추진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작업에서 삼성은 실질과 다른 명분을 내세웠다. 실질적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삼성물산이라는 계열사의 사업구조 재편으로 둔갑시켰다. 국민과 언론, 여론주도층을 줄 세우기까지 했다. 합병에 찬성하면 애국, 반대하면 매국이라는 구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삼성이 보여준 드라마는 막장이라기보다는 블랙코미디에 가까웠다. 이 드라마의 주역은 늘 동네 발전을 외치며 실제로는 자신의 몫을 챙기는 약삭빠른 이웃집 아저씨다. 막장이건 블랙코미디이건 기분이 언짢은 것은 매한가지다. 어떤 드라마에서든 우리 경제의 주역인 재벌 일가의 전근대적 인식과 전대미문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재벌을 온전히 자신들의 것이라고 여긴다. 무조건 자신의 아이들에게 물려줘야 한다고 여긴다. 그것도 최소한의 비용만으로.

그뿐만이 아니다. 재벌가의 오너와 창업주, 후계자들은 하나같이 사회의 법과 정책, 상식 위에 서 있다고 믿는다.

이는 롯데와 삼성의 논란 많은 승계 작업뿐만 아니라, '땅콩 회항' 사건처럼 2·3세가 저지른 숱한 터무니없는 일들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얼마전 개봉한 영화 '베테랑'에서 안하무인인 재벌 3세 유아인은 그런 인식의 결정판을 보여주는 대사를 흘린다. '정부가 기업을 너무 쉽게 생각해. 우리가 돈 벌어서 내는 세금으로 굴러가면서'

재벌 일가가 벌이는 별의별 드라마를 다 본 우리는 너무 지쳤다. 가히 '재벌 피로증'이라고 할 만하다. 자녀들에 자신들의 시대에 뒤떨어진 인식과 사회를 뒤흔드는 영향력을 고스란히 몰려준 오너나 창업주에게도 실망이다. 그들이 나라 경제를 볼모로 벌이는 애국 타령도 지금은 지겹다. 이제 좀 적당히 하시라.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