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 북마마 대표

추석 연휴 동안 서귀포로 이사를 했다. 다 들어낸 건 아니고, 지금 사는 집에서 살림을 좀 나눈 것. 당분간은 서귀포와 제주를 오가며 살아야 한다. 사정은 이렇다.

4년전 가을, 우리 가족은 뭍에서 이주해 왔다. 큰놈 때문이었다. 단 1학년 1학기를 다녔을 뿐이었지만 큰놈은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지능지수 상위 0.1% 이상 고도영재아라는데, 한국 사회에서 영재라고 불리는 아이들의 눈앞에는 '대치동 코스'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지역교육청/대학부설영재기관-(고교선행)-영재고/과학고/민사고/외고-SKY/KAIST/의치대-유학으로 이어지는 빤한 코스 말이다.

이 사이에 황소니 미탐이니 하는 유명학원들이 줄줄이 끼어있었다. 영재코스 진입의 '프렙(예비학교)' 역할을 하는 일류학원이라고 했다.

거기 들어가려고 새끼학원에 다니거나 학원숙제를 도와주는 새끼선생을 고용하는 광경도 흔했다. 아이들은 어느 한 단계에서라도 낙오하면 자존감을 갖고 살기 어려운 지경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모두 강남 한복판에서, 20세기 한국의 공교육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안과의사와 신문기자, 중산층으로 살기에 모자람이 없는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껏 달려온 대로 달리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새끼 앞에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우리에게 온 21세기의 아이는 그런 식으로 키우면 망가질 게 뻔했다. 눈 앞에 보이는 길은 지난 세대의 답이었을 뿐, 미래 세대를 위한 정답은 아니었다. 우리는 '대안의 섬' 제주로 왔다. 어쩌면 인생을 건 선택이었다.

회색 콘크리트 바닥에 깊이 내린 뿌리를 뽑아, 붉은 화산토에 이식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다. 당장은 돌쟁이 작은놈까지 있어 운신의 폭이 좁았다. 본진을 신제주 아파트 단지에 꾸리기로 했다.

지금껏 봐오던 도시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아선지, 외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결정적으로 달랐던 건, 5분만 나가도 눈 앞에 바다가 보인다는 점이었다. 큰놈은 셔틀버스를 태워 통학시키고, 남편은 구제주로 출근했다.

주말마다 바다로 오름으로 나섰다. 아이들은 까맣게 탔다. 큰놈은 빠르게 '정상화'되어 더 이상 외로운 영재의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 대신 행복한 아이가 됐다. 우리가 바라던 바였다.

제주는 우리에게 많은 기회를 열어주었다. 필자는 만 3년 꼬박 품에서 키운 둘째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지난해 가을 전자출판을 업으로 하는 1인 기업을 만들어 다시 집밖으로 나왔다.

사업자등록부터 세금계산까지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출퇴근 시간도, 월급도 보너스도, 휴가도 야근도 없는 직장. 버지니아 울프부터 앨리스 먼로까지 자아를 가진 여성작가들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자기만의 방', 나의 '사무실'에서 생애 첫 책을 썼다. 그리고 지금은 제주도와 카카오가 주관하는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의 파트너로서 창업계의 변화들을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제민일보에도 귀한 지면을 얻었다. 이제 어느 조직에 매이지 않고도 글을 쓰는 자, 이야기를 남기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남편은 페이닥터 생활을 정리하고 올 가을 서귀포에 개업을 했다. 우리는 꿈꾸던 집을 짓기 전에 남의 집을 빌려 한 번 살아보기로 했다.

연휴 동안의 이사는 그 실험의 첫 세팅 과정이었다. 이사를 하던 날 밤, 제주에서는 달님을, 서귀포에선 반딧불을 봤다. 평화로에는 코스모스와 억새가 피어있었다.

그러니까 이 가을, 모든 것이 다시 새로운 시작이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첫 발을 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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