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휴 전 초등학교 교장·논설위원

"왕을 갈아치우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새 임금을 받들어 나라를 잘 다스려야지요" "어떻게요?" "어떻게라니요. 그냥 잘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수강생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우리는 역사를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새 임금을 모셨으면 당연히 새로운 정책을 개발하고 새로운 국가경영의 비전을 제시해야 반정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고개를 끄덕이는 분도 계시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도 없지 않았다.

조선의 역사엔 두 번의 반정(反正)이 있었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과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이다.

하지만 임금과 집권세력만 바뀌었을 뿐 백성을 위한 정책에는 하나도 새로운 것이 없었다. 아니 인조의 경우에는 명(明)과 후금(後金·청)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폈던 광해군정부만큼도 못해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불러들여 임금이 청 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을 겪었을 뿐 아니라 50만이 넘는 조선인이 청나라로 끌려가는 비극을 초래했다.

그때 반정세력이 새로운 정책을 폈더라면 조선은 '새로운 개국'의 기운과 활력이 넘쳤을 것이고 주변국과도 국가이익에 맞는 외교를 펼쳤을 것인데 말이다.

정조는 개혁군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도 성리학 이념에 갇혀 미래를 보는 눈이 좁았던 것 같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해 수원에 행궁을 짓고 13차례의 행차를 할 때마다 35~40척의 배를 징발해서 한강에 '배다리'를 만들게 했고, 행렬에는 1500명에서 많게는 5000명의 군사를 동원했다.

이들은 농민을 소집한 무보수 임시직이 태반이었다. 우리가 '아, 참 멋지다!'고 감탄하면서 보는 '화성행행도'에는 수많은 백성들의 고달픔이 서려 있는 것이다.

정조에겐 개혁의 기회가 있었다. 재임 7년(1783) 7월18일의 왕조실록을 보면, 청나라에 다녀온 대사헌 홍양호가 '수레·벽돌의 사용, 당나귀·양의 목축 등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린 기록이 나온다.

정조는 어떻게 했을까. 의논해보라는 지시를 받은 비변사가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이자 이 개혁안은 무시돼 버린다.

그때 만약 정조가 아버지를 위한 화성 건설 대신에 이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더라면 조선의 도로는 수레를 이용할 만큼 시원스럽게 넓혀지면서 육상교통이 한층 발달했을 것이고, 개항 후 서양 선교사들이 눈살을 찌푸릴 만큼 좁고 더러웠던 주택도 상당히 개선됐을 것이다.

100년 정도를 앞당길 수 있는 개혁의 기회를 그냥 흘려버린 게 아닐까.

모르거나 잊혀진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훗날 우리 자손들이 21세기 초, 온 세계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할 그때 조상님들은 무엇을 하셨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일자리 창출, 중국 등의 추격을 받고 있는 자동차·조선(造船), 그리고 미래유망 6T산업(IT=정보통신기술, BT=생명공학, NT=초정밀기술, ET=환경공학기술, ST=우주항공기술, CT=문화콘텐츠기술)을 발전시키는 일이 있다.

또한 핵을 가진 북녘땅 세력이 넘보지 못할 탄탄한 국방력 갖추기, 주변 4강을 넘어 세계로 뻗어가는 외교와 무역, 그리고 갈가리 찢긴 국론통일과 화합 등 할 일은 산같이 쌓여 있다.

잠자는 법률안은 들여다보지도 않고 날마다 싸움질만 하는 국회나, 피나는 세금으로 모은 국방비를 갖고 엉터리 무기를 사들이는 사람들에게도 한마디 하고 싶다.

훗날 우리 자손들이 "그때 조상님들이 국가경영을 잘 해주신 덕택에 우리 후손들이 잘 살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이제는 정말 우리 모두가 마음과 지혜를 한데 모으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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