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그 까닭 모를 신열(身熱)

 청춘의 신열을 앓아보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으랴. 무엇이든 될 수 있었지만 정작 아무 것도 아니었던 스물의 언저리. 그 좁은 생의 골방에서 미지에 대한 불안과 마주하며 나날을 작취미성(昨醉未醒)의 안간힘으로 겨우 버티던 그 숱한 나날들.

 때로 관념은 현실보다 더 냉혹한 법. 불안보다는 앞날의 불안에 대한 관념이 더 우리를 절망스럽게 만들었던 순간들.

 청춘이란, 그리고 청춘의 아픔이란 결국은 시절을 견디어 온, 그래서 좋든 싫든 그 시절의 우리로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린 후에야 비로소 느껴지는 것일 터. 청춘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 뛴다는 말은 결국 되돌릴 수 없는 추억에 바치는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청춘이라는 다소 복고적인 제목을 달고 세상에 나온 2001 청춘 시리즈는 문단에 얼굴을 내민 지 채 10년이 되지 않은 젊은 작가들의 단편을 모아 놓고 있다.

 1∼2권의 소설집을 발간했거나 이제 막 그 소설의 시작을 보여준 작가에 이르기까지 14명의 남녀 작가들이 뿜어내는 소설의 향취는 문단의 침체를 뚫고 가려는 일단의 패기만만이 눈에 띈다.

 65년 생 정영문부터 73년 생 윤성희까지 이들이 풀어놓는 소설 속의 세계는 모두 다르다. 그러나 그 다름이란 결국 문학이 더 이상 예전의 영화를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온갖 세상의 추문을 거부하는 격렬한 몸짓을 보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김경욱·김상영·김연수·김종광·김호창·정영문·조헌용 등 남성작가의 작품을 모아놓은 소설집 「주머니 속의 송곳」이나 강영숙·권지예·김별아·김연경·류가미·박수영·윤성희 등 여성작가의 소설을 모은 「이상한 오렌지」 등은 청춘의 신열과 정면으로 맞서 싸운 작가들의 처절한 생의 기록이다.

#주머니 속의 송곳에서 이상한 오렌지까지

 낭중지추(囊中之錐). 재능이 있는 자는 어디에 있든 그 재능을 숨길 수 없다는 뜻일 터. 하필이면 작품집의 제목을 이렇게 지었을까.

 전생의 기억에 대한 추적을 담고 있는 김경욱의 ‘리틀빅혼 일대기’는 잃어버린, 또는 잊고 있었던 전생에 대한 기억을 통해 우리 소설의 지평을 아메리카 인디언의 삶까지 밀어 넣고 있다.

 「경찰서여, 안녕」을 펴내며 예의 그 입담 좋은 솜씨를 자랑하는 김종광의 ‘언론낙서백일장’은 언론 개혁에 대한 작가의 뛰어난 알레고리가 그 걸쭉한 입담과 만나 새로운 무늬를 직조해 놓는다.

 정신 세계에 대한 흡사 프로이트와 라깡의 그 학문적 서술들을 변주해 내는 듯한 정영문의 ‘습기’와 단군이래 최고의 역사라고 자랑하던 새만금 간척사업을 한 덤프 트럭 기사의 시각에서 바라본 조헌용의 ‘고래가 올 때’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작품들은 다양한 소설의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 때문에 병들어 버린 엄마, 그런 엄마를 닮진 않았지만 혈관 속에 흐르는 가족력 때문에 비극적 운명을 살아가는 나를 그리고 있는 김별아의 ‘비너스와 큐피드의 알레고리’는 복수보다는 용서의 유일한 방편으로 모험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자기파괴를 보여준다.

 러시아에서 유학중인 남자에게서 성병을 얻으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코믹터치로 그려낸 김연경의 ‘내 몸 속의 곰팡이’는 여성작가들에게서 흔히 보여지는, 그래서 하나의 주류가 되다시피 한 사담류(私談流)의 내적 독백을 찾을 수 없다.

 특히 김연수의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은 현대사의 비극인 광주항쟁에 대한 작가 특유의 서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광주항쟁이 있었던 1980년 늦둥이를 가졌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주인공과 언니가 쫓기듯 이사 갈 수밖에 없었던 타향 경상도에서 ‘깽깽이’라는 멸시를 받으며, 아버지가 예전에 스크랩해 두었던 기사를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다시금 되돌아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빛들은 우울한 청색을 닮았다

 문학상을 수상했거나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지 채 3년이 안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있지만 이들의 작품들은 생기발랄함보다는 우울한 청색을 띠고 있다.

 작품을 통해서는 성구별이 거의 불가능하다. 12명의 작가들이 빚어내는 작품들은 회색의 정조가 주를 이룬다.

 쓸쓸하고 쓸쓸하고 더욱 더 쓸쓸해지는, 그래서 그 쓸쓸함이 무한으로 치닫는 이들의 작품들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평론가 김 현은 문학이란 세상의 추문을 들춰내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이들의 작품들은 현실의 온갖 부조리함, 뒤틀릴 데로 뒤틀려 버린 세상에 대한 변주인 셈.

 이들의 소설 속에서 현실이란 공장 밖에는 다닐 곳이 없던 동네에서 결국 15년째 필름공장에 다니는 남자와 결혼해 그렇고 그런 생활을 하는 주인공이 겪는 만성두통 덩어리(강영숙 ‘피라미드 모양의 만성두통’)같은 것이다.

 이들이 바라보는 잿빛 현실. 때로는 그 잿빛의 처연한 무게 때문에 가슴이 서늘해지며 막막해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체 모를 삶의 무게를 에둘러 가거나 은근 슬쩍 뒤켠으로 내려놓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작품들은 앞으로 한국 문단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결코 다다를 수 없다하더라도 끊임없이 현실의 추문을 들춰내며 상상력의 막장까지 그것들을 밀어 넣는 것. 이들의 소설에서 바라보며 느끼는 독자들의 소박한 희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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