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두 제주언론인클럽·논설위원

제주 해녀 어업이 국가 중요 어업유산 1호로 지정됐다. 이는 내년에 있을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국내에서 먼저 국가 중요 어업유산으로 지정하는 것이 순서라는 판단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2017년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 세계 중요 농업유산 등재 자격까지 갖추면서 해녀 3관왕 달성이 가까이 온 느낌이다. 이에 앞서 제주도는 '해녀', '잠수' 등으로 불리던 이름을 '해녀'로 용어를 일원화하는 조례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오랜 논의에 종지부를 찍은 느낌이다.

해녀가 일본에서 만들어진 용어이기에 잠수 등으로 바꾸자는 논의는 오랫동안 계속돼 왔다. 그러나 잠수(潛嫂)의 '嫂'자는 '형수 수'라는 것을 생각하면 '자맥질하는 아주머니' 또한 명쾌하지 않다. 앞으로 국제사회와 언론의 관심을 생각할 때 행정 측면에서 보면 용어의 통일은 필요하고 '해녀' 로 선택한 것은 적당했다고 본다.

해녀 하면 떠오르는 큰일이 있다. 1931년 6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일어났던 해녀항일운동이다. 구좌읍, 성산읍, 우도면에서 해녀 1만7000여명이 불같이 일어나 일제착취에 항거했던 운동은 한국의 여성운동사 측면에서 깊이 있는 연구가 있어야 한다.

항일운동을 하면서 해녀들이 불렀던 '해녀의 노래'에 대한 기록에 관한 것이다. 제주도가 펴낸 「제주의 해녀」나 제주해녀항일투쟁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펴낸 「제주해녀항일투쟁실록」등을 보면 「해녀의 노래」는 홍무향씨가 옥살이하는 남편 오문규씨를 면회갔다가 강관순씨도 면회했는데 그때 강관순씨가 줬던 종이쪽지를 집에 와 펴보니 '해녀의 노래'가 적혀있어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여기엔 두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해녀항일운동이 일어나고, 이 운동을 하다가 78명(남43·여35)이 검거돼 더러는 훈방되고 더러는 감옥살이를 했다. 항일운동을 하다 감옥살이를 하던 사람에게서 노랫말을 받아다가 '해녀의 노래'를 부르면서 항일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다. 음악은 만든 사람, 가르친 사람, 배우는 사람, 그리고 이를 전파한 사람이 있어야 행진하면서 부를 수 있다. 쪽지로는 안된다. 심도있는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1926년 3월 제주 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강관순은 고향 우도에서 모교인 영명의숙의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이때 노랫말을 짓고 일본의 '도쿄 행진곡'에 맞춰 '해녀의 노래'를 만든 것이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학생들에게는 "노래는 기록으로 남기지 말 것, 어디서 배웠다고 말하지 말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리고 노래를 보급하기위해 연극 '이수일과 심순애' 를 각본, 연출, 주연을 맡아 공연했다.

공연 전에 무대에서 학생들이 '해녀의 노래' 를 불렀다. 이수일 역에 강관순, 심순애 역에 이두삼(남)이 맡았다. 이 연극을 보는 핑계로 모슬포의 오대진, 한림의 이익우, 세화의 김시곤·문도배, 신도의 부태환, 종달의 한향택, 하도의 오문규·김순종, 용담의 강창보 등이 우도에 와서 강관순의 집에서 묶으며 회합을 가졌다.

'해녀의 노래'는 이렇게 퍼졌고, 세화리 장터까지 이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던 것이다. 북제주군 문화원은 영명의숙이 있었던 자리와 강관순이 살았던 집에 기념비를 세우기로 했다. 영명의숙 자리는 개인의 소유여서 학교가 있었던 근처인 상우목동길 옆에 세웠다.

강관순의 집은 지금도 그의 딸인 강길녀가 살고 있다. 그러나 집의 위치가 골목 안쪽이어서 사람의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세우자는 의견이 많았다. 집에서 70m 떨어진 바닷가 길옆에 세웠다. 파도가 거친 날은 바닷물이 바람에 날려 닿는 곳이다.

우도는 이제 이름난 관광지가 됐다. 올해 벌써 200만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찾았다. 어느 길손이 지나다 한번 이 표석의 글을 읽어줬으면 좋겠다. 세월이 제법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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