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세월은 가고

 한 세월이 지고 있다. 거리는 한 해의 마지막을 알리는 갖가지 상징들로 가득하다.

 필리프 들레름과 마르틴 들레림 부부가 글과 그림으로 장식한 「고독하지 않은 홀로되기」의 시작은 시간에 대한 서술에서 비롯된다.

 ‘시간의 곡선이 지상의 곡선과 일치한다면 더 이상 이루어져야할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시간이란 직선적이며 그 끝이 보이는 어떤 것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세모(歲暮)의 거리에 지고 있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세월이다. 인간에 의해 구분 지어진 시간이란 다시 지상의 공간에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추억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망각의 저편으로 걸어 들어갈 뿐이다. 그 시작과 끝이 분명한 시간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순간, 희망은 이미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한 세월이 지면 또 한 세월이 우리를 기다린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고독하지…」는 사물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다. 추억·고독·우수·시간·여행·영감·자유 등 일상에서 느끼는 순간들을 사려 깊은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다.

 남편 필리프의 사물에 대한 시선에 대해 부인 마르틴이 한편의 수채화를 곁들인 이 책은 잔잔한 기쁨의 순간을 맛보는 행복을 전해 준다.

 이 책은 분명 에세이집이다. 에세이란 우리나라 출판계에서는 다분히 손쉽게 일정량의 판매부수를 담보할 수 있다는 출판사의 전략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에세이류들은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사나 부박한 현실에 대한 나약한 도피의 문장들로 짜여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독하지…」는 결코 삶을 아름답다거나 도피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다만 너무나 하찮은, 그래서 이제 그 의미조차 잊어버린 소박한 삶의 의미를 최소한의 문장으로 드러내고 있다.

#혼자서, 그러나 고독하지 않게

 추억·고독·우수·시간·여행·영감 등 모두 30개의 명사에 대한 짤막한 단상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오히려 행간의 여백은 우리에게 충분한 사유의 공간을 마련해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자유를 꿈꾼다. 그러나 우리가 꿈꾸는 자유란 대부분 일상으로부터의 자유일 것이다. 회사에 얽매이지 않고 맘껏 여행하거나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것.

 하지만 이런 것들은 대부분 너무 관념적이다. 단 하루만 휴대폰과 컴퓨터를 멀리한다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거나 이 메일을 확인하고 싶어진다. 불안. 자유를 꿈꾸지만 홀로 있다는 것에 대한 불안이 우리를 옥죄고 있다.

 하지만 필리프가 생각하는 자유란 이런 것이다. ‘고독하지 않은 홀로되기, 동시에 섬과 섬을 꿈꾸는 배가 되기. 움직이지 않는 채 공간을 차지하고, 쉼 없이 나가며 시간을 멈추게 하기. 행복해하기. 실망하기, 다시 행복해 하기. 어린 시절 생각하기. 책읽기’

 이 짧은 문단의 오른편에 그의 부인인 마르틴의 파스텔톤 그림이 자리잡는다. 파도가 금새 덮쳐버릴 것 같은 바다 한 가운데 몸 하나 뉘이면 그만일 공간에서 혼자 책 읽는 사람의 모습.

 자유에 대한 경구를 굳이 읽지 않아도 좋다. 파스텔톤의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각 명사마다 원고지 2∼3매를 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단 몇 분만에 책을 덮을 수 없게 만든다. 오히려 책 말미에 색인처럼 곁들여진 각 명사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그 것의 의미를 마음껏 즐기다 보면 어느새 동이 훤하게 터 오는 것을 경험할 수도 있다.

#너무 흔한, 그러나 알지 못하는 것들

 너무나 하찮게, 그리고 오랫동안 우리 안에 묻어두었던 소박한 감각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삶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결코 과장된 포즈이거나 짐짓 거드름을 피우지도 않는다.

 다만 솔직하게 우리들의 내면 속에 자리잡은 삶에 대한 사랑을 조용히 피워 올릴 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찮은 것이란 없다.

 필리프와 그의 부인이자 일러스트 작가인 마르틴 들레림이 함께 한 「고독하지…」는 지난 10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처음 선보인 이래 세계 각 국의 출판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 주목의 배경에는 삶에 대한 진지하면서도 그 무게에 의해 주눅들거나 과장된 찬사를 배제했다는 점이 작용했다.

 이 책의 미덕은 생에 대한 또 다른 시선, 특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지나치는 것들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되새김질 할 수 있는 사유의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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