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제주의 벌초 이야기

세상은 달라지고 있지만 고유의 미풍양속 지켜져
흩어진 가족한자리 모여 추석 전까지 묘소 다듬어
친척어른 옛 얘기 들으며 조상님 지혜 배우는 기회

주말 벌초 준비가 한창이다. 이미 끝난 집도 많다. 이 때가 되면 늘 그렇듯 오가는 대화가 흥미롭다. 한 집에 한 명 이상은 꼭 참가해야 하고, 점심 준비는 어느 집 차례고, "동편은 큰 집에서, 서편은 작은 집에서"교통정리에 정신이 없다. 이런 고생을 왜 사서하나 싶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뭔가 잊은 것 같아 뒷맛이 찜찜하다.

#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

"행복이 시작되는 지점은 어디입니까?""소욕지족(小欲知足), 작은 것을 갖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알면, 행복을 보는 눈이 열리겠지요. 일상적이고 지극히 사소한 일에 행복의 씨앗이 들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죽음을 삶의 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확고해지면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어요. 거부하려 들면 갈등이 생기고 불편이 생기고 다툼이 생기는데, 겸허하게 받아들이면 편안해집니다." 

지난해 봄, 슬쩍 가슴을 흔들었던 잔잔한 파문 하나가 이 계절 다시 고개를 든다. 입적 5주기를 앞둔 법정 스님과 뒤를 좇듯 2013년 세상 소풍을 마쳤던 '영원한 청년' 최인호 작가가 10년도 더 전 길상사 요사채에서 가진 4시간의 문답을 담은 산방대담집 「꽃잎이 떨어져도」다. 

여기에 최 작가가 '인연'을 통해 던졌던 '칼국수'이야기까지 얹고 나면 여름과 가을이 만나는 이 시기의 느낌이 묵직하게 가슴을 친다. '가장 소박한 음식 중에 하나인 칼국수를 가장 소박하고 진실한 정성을 다해 만드는 일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요즘도 칼국수가 그리워지는 날이면 그 집을 찾아가곤 한다. 거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맛있는 음식이란 세상에 없다'는 낮은 목소리는 이 맘 때면 예초기를 손보고, 상에 올릴 음식을 챙기느라 부산한 '벌초'와 맞닿는다.

# 고유 미풍양속…마음 가짐

벌초는 전국적으로 행해지는 우리나라 고유 미풍양속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묘소를 정리하는 과정의 하나로, 조상의 묘를 가능한 한 단정하고 깨끗이 유지하기 위한 후손들의 정성의 표현으로 정리된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무덤의 풀을 깎아 깨끗이 한다는 뜻이다.

주로 봄, 가을 한 해 두 차례 채비를 하는데 봄에는 한식(寒食)을 전후해서, 그리고 절기상 무더움 여름이 기울기 시작하고 찬바람이 부는 처서(處暑)와 백로(白露), 백중 후부터 추석 전까지 벌초를 한다. 처서가 지나면 풀이 더 자라지 않기 때문에 무덤의 풀을 베어 말끔히 단장할 수 있다는 민속지식을 따른 것이다.

'벌초'얘기만 나오면 신경이 쓰이는 것이 세월이 갈수록 늘어나는 그 무덤들을 어떻게 정리를 할 것인지. 이 산, 저 산 흩어져 있는 것들을 어찌 다 찾아 관리할 것인지, 바쁜 일상 속에 시간 맞추기가 여의치 않아진 사정이 보태진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 한데 모여 땀을 흘리고 나면 하나같이 십 년 묵은 체증을 내린 듯이 시원하고 뿌듯한 마음이 된다. 적어도 요즘 어떻게 사는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고 답할 수 있는 '기회'는 덤이다. 조금 더 마음을 비우고 돌아보면 '산다'는 일에 대한 생각까지 정리할 수 있다.

육체는 덧없이 가버리지만, 남겨 진 인연의 흔적들은 무의식에 남는다. 혹여 잊을까 싶으면 이런 기회들로 기억된다. 보태 나는 누구에게 어떤 인연이 될 것인지 까지 곱씹을 수 있다.

# '바라보는 일'에서 배우다

"차례상에 '피자'를 올려도 되냐"는 우문에 "정성이 있으면 된다"는 현답(?)을 한 기사가 화제가 됐다.

명절 연휴에 맞춰 여행을 가고 망고.파인애플 같은 수입산 과일에 피자.치킨같은 메뉴가 익숙해진 요즘 어쩌면 자연스런 일인지 모른다.

전통문화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자면 수입산 과일을 올린다고 '잘못'은 아니다. '조율이시(棗栗梨枾)'니 '홍동백서(紅東白西)'니 하는 규정들도 '꼭 그래야 한다'는 약속과는 무관하다.

피자나 치킨, 케이크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좋은 물건, 맛있는 음식을 조상에게 바치는 것은 잘 못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성이다.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어떤 마음인가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조상 묘 벌초는 조금 다르다. '가능한 해야 한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후손들이 조상의 묘를 돌본다는 '예(禮)'의 의미 때문이다. 다만 후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바쁜 일상으로 직접 벌초를 할 수 없어 다른 사람에게 대신하도록 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해석했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닌 조상을 기리는 마음, '정성'이라는 얘기다.

다시 두 사람의 대담으로 돌아가 법정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한데 소유하려고 하는 욕망 때문에 인생이 피곤해진다"고 말한다. 요즘 새삼스럽지도 않은 얘기다. 인간의 소유욕은 대상을 소유하는 순간 휘발하고, 욕망은 또 다른 대상 속으로 부나비처럼 이동한다. 그런 허깨비 같은 삶의 공전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바라보는 일'이라고 말한다.

벌초를 하는 것도 꼭 같은 마음이다. 부동산 가격이 날개를 달면서 이 땅이 내 것이요, 저 땅도 내 것이라 다툼도 잦아졌다. 그저 마음을 비우고 말끔하게 정비된 무덤과 산담을 보는 일, 벌초를 통해 배우는 '삶의 지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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