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승남 사회부 차장대우

1829~1837년 재임한 제7대 미국 대통령 앤드류 잭슨이 정부 내각(parlor cabinet)이 아닌 외부 관계자들에게 정치적 조언을 얻자 반대파가 이를 비판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표현이 '키친 캐비닛'(kitchen cabinet)이다. 오늘날 대통령이 비공식적인 조언을 얻는 조력자라는 의미로 흔히 쓰이고 있다.

과거 대한민국 정치사에서도 이 단어가 등장한 적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4년 청와대 관저로 정치권 인사들을 초청해 '식사정치'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자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나와 비슷하게 학력이 낮고, 독학으로 변호사를 하고 대통령이 됐다"며 "대통령이 된 다음에 생긴 버릇이 있는데, 식당에서 국정을 각료들과 논의했다 해서 '키친 캐비닛'으로 불렸다"고 했다.

식사를 '소통'의 수단으로 해 국정운영을 하겠다는 의지를 '키친 캐비닛'이라는 말로 대신한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키친캐비닛을 통한 국정운영을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은 바 있다. 1999년 김 전 대통령은 권노갑 전 부총재 등 당시 당내 영향력이 큰 중진 인사들을 청와대로 불러 의견을 청취했다. 당 공식 채널과는 별개로 키친캐비닛을 가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언론은 "격식을 갖춘 공식 보고와 지시와는 별개로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민심의 현주소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정치구상을 가다듬는 자리로 활용한 것 같다"는 분석을 내놨다.

박근혜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자신의 탄핵소추안에 대한 답변서에서 국정농단의 주범인 최순실에 대해 키친 캐비닛이라고 지칭하면서 또 다시 이 단어가 정치권과 국민들의 입에 오르고 있다.  

대통령 연설문 등이 최순실로 흘러들어간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순실을 국정운영에 도움이 되는 인물로 포장한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연설문 수정 등 조언 수준을 넘어 고위 정부 인사명단에 '빨간펜'을 들이댔다는 정황이 박영수 수사팀에 의해 포착된 최순실에 여론을 전달하는 통로인 키친 캐비닛이라고 미화하는 것은 근거가 없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어대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하는 견강부회(牽强附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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