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편집부장 대우

한 지방대학 시간강사가 있었다. 그는 8년간을 강의하고 연구하고 행정노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대학의 구성원이자 주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건강보험 혜택조차 받을 수 없었고 재직증명서 발급 대상도 아니었다. 그는 타인의 욕망을 대리하면서 강의실과 연구실에만 존재했던 것이다. 대학을 나온 그는 생계를 위해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거쳐 대리운전을 하게 된다. 그는 거기서 대한민국 사회에 은밀하게 자리잡고 앉은 대리사회의 괴물을 발견한다. 그 괴물은 그 누구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며 모두를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대리인간으로 만들어 낸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혔다(김민섭 「대리사회」). 

대리(代理)는 남을 대신하여 일을 처리한다는 의미다. 회사에서 어떤 직위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대리점은 타인의 위탁을 받아 매매를 하는 도매상의 일종으로 보험 대리점이나 가전제품 대리점 등이 있다. 또 우리들은 음주운전을 하지 않기 위해 대리운전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신해서는 안 되는 일을 대신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 일부 성형외과에서는 광고 등을 통해 알려진 유명 의사가 수술할 것처럼 상담해 놓고 실제 쉐도우 닥터(그림자 의사)가 대리수술을 하다 적발되기도 했다. 또 화투 그림으로 알려진 가수 조영남은 다른 화가에게 수고비를 주고 그리게 한 그림을 판매해 물의를 빚었다. 이 사건은 작가의 영역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며 '대작(代作)'이라는 신조어까지 낳았다. 또 얼마전 도박빚 때문에 돈을 받고 외국어 능력시험을 대신 봐준 유학생 출신 남성이 구속되기도 했다. 

요즘처럼 '대리'라는 말이 국민들을 속상하게 한 적이 있을까. 주사제 대리처방, 연설문 수정, 인사 개입 등 '비선 실세' 최순실의 의혹은 끝이 없다.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은 주체적인 인격이 아닌 타인의 언어와 행동, 사유를 대신한 '대리 대통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주말마다 많은 국민들이 광장에 모여 촛불을 밝히고 있다. 이는 '대리 국민'을 거부한 이들의 주체선언 같은 것이다. 대리가 필요하거나 편리할 때도 있지만 내 삶까지 대신 살아줄 수는 없지 않나.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