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주 제주에코푸드 대표, 논설위원

정유년 새해 초, 어둠을 가르는 청명한 붉은 닭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유배섬의 역사와 문화교류'라는 학술주제 아래 제주국제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중국 남경대 테무르 교수가 도민들의 관심을 끌만한 흥미로운 논문 한편을 내놓았다. '유배지로서 탐라: 명나라 초 20년의 위치와 운명'라는 이 논문은 '중국 운남성에서 유배 온 사람들의 타향살이 역정'을 담고 있다.

요지는 원(元)세조 쿠빌라이칸의 피를 이어받은 왕족들이 제주도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족의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많은 몽골 황실 가족과 제왕들을 탐라로 유배시켰다. 그들은 돌아가지 못하고 제주에 정착했으니 바로 칭기즈칸의 후손들이었다. 

제주도에서 그 후예들의 묘지가 발견된다면, 세계 최초의 발견이 된다. 고고학적으로 세계사적 발견이 될 것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칭기즈칸 혈족의 무덤은 발견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이들 황족들은 모두 3차에 걸쳐 제주로 유배됐다. 먼저 1382년 쿠빌라이의 손자의 아들인 백백태자의 가솔이 운남에서 제주로 왔다. 이들 중 아들은 제주 생활 10년, 백백태자는 22년 만에 죽었다. 그의 부인은 남편이 죽은 후 40년을 더 살았다. 두 번째 이주 그룹은 대규모다.

1389년 북방 정벌 때 투항한 달달친왕의 일행 80호가 무리를 지어 제주로 건너왔다. 그리고 1392년 운남 양왕의 자손 아얀테무르를 전입시켜 이들과 어울려 함께 살도록 했다. 이러한 기록에서 주목할 점은 칭기즈칸의 황금씨족들이 집단을 이뤄 제주에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서귀포시 하원동 오름 기슭 속칭 '여가밭'이라는 구릉에 가면 대형분묘 세 기가 보인다. 일명 '하원동 왕자묘'라고 불린다. 쿠빌라이 칸의 재임 시 중창한 법화사가 인접한 곳이다. 축조된 분묘의 규모로 보아 제주토호의 그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품계가 매우 높은 피장자가 묻혀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남쪽에 전진 배치된 묘에는 석인상 두 기가 서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머리가 없고 다른 하나는 머리가 달려 있다. 전자는 현재 묘지에 있고 후자는 제주자연사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서있다. 

제주도의 일반적인 석상과 크게 다르다. 형태적으로는 문인석이다. 대형 홀(또는 규)을 들고 있으며 옥대를 차고 있기에 그렇다. 

흥미롭게도 석상의 모습은 중국 북경에 있는 칭기즈칸의 책사 야율초재를 형상화한 그것과 같다. 복식은 전형적인 유목민 델이다. 옷소매는 넓고 긴 주름이 잡히고 목에 둥근 깃을 한 모습이 동일하다. 손에 들고 있는 홀의 길이가 긴 것으로 보아 품계가 높은 신분의 형상이다. 홀의 상단은 둥글고 하단은 네모진 것으로 비춰 원 대칸이 각 영지의 제후를 봉할 때 주는 옥으로 만든 규(圭)라고도 할 수 있다. 

옥을 더해 만든 요대를 허리에 찬 모습도 같다. 다만 하원동 문인석의 모자는 야율초재의 것과 다르고 쿠빌라이칸의 초상화에 나오는 그 것과 유사하다.

한편 또 다른 하원동 석인상은 몽골초원의 석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참수형이다. 선사시대 유목민들은 조상숭배로 조상이 사망하면 그 머리를 참수해 장식을 꾸미고 경배하는 머리숭배 의식이 있었다. 

따라서 하원동의 참수형 석인상은 누가 일부러 손상시킨 것이 아니라 조상숭배를 위해 제작된 형상으로 보인다. 하원동 석인상은 한라산 인근에서 채취된 조면암으로 제작됐다. 화강암과 달리 풍파에 약한 것이 흠이다.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세워둔 왕자묘 석인상은 마모 상태가 심각하다. 코는 갈아서 가루를 내는데 이용됐고 몸통은 비바람에 풍화되고 있다. 

만일 하원동 왕자묘의 피장자가 칭기즈칸의 황족이라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잠자는 세계사를 깨우는 세계의 유적이 된다. 바로 동방의 세계사 속으로 편입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지나치게 '침략과 저항의 역사'라는 애국주의 늪 속에 갇혀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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