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성장을 위한 독서산책 33. 존중을 가르쳐 주는 그림책

누구나 공감하며 사랑하는 따뜻한 이야기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행복상자

얼마 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일흔을 넘긴 남자 배우가 아내와 '졸혼(卒婚)'을 선언하고 혼자서 생활하고 있음을 밝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최근 들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이 졸혼이라는 단어는 일본의 한 작가가 만들어낸 신조어로, 한자 뜻풀이 그대로 결혼을 졸업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부부가 합의 하에 졸혼을 선언하면, 혼인관계는 유지한 상태로 각자의 독립적인 삶을 인정하고 자유롭게 살아가게 된다. 지난 해 우리나라의 50대 이상 황혼이혼율은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며 전체 이혼율의 30%를 육박했다. 이런 세태 속에 졸혼은 새로이 부부관계를 정립하는 하나의 대안으로 주목 받을 충분한 이유를 갖게 됐다. 우선 졸혼은 육아를 마친 중장년 부부에게 해당되는 생활방식이다. 자녀를 떠나보낸 후, 부부 둘만의 생활이 시작됐을 때야말로 새로운 관계의 정리가 필요한 순간이다. 이 때 지난 시절의 가부장적인 가족 문화를 버리지 못하고 구속하고 군림하는 생활이 이어진다면, 황혼이혼이라는 파국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졸혼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유독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만 주목받고 있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결혼의 시작단계부터 각자의 삶을 존중해주는 서양 문화권에서는 굳이 졸혼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인데, 이는 일본과 우리나라가 공통적으로 가부장적인 결혼 문화를 갖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전에 비해 까마득하다할 만큼 길어진 삶 속에서, 인생후반부만큼이라도 온전한 나로 살아가고픈 노인들의 바람이 왜인지 서글프다.

가족이면서 존귀한 인간임을 인정

이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이 갖는 구속력은 대단하다. 결혼을 했기 때문에, 너는 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가족 안에서 개인은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자유보다는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임무가 우선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구속은 결속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돼,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당연한 힘을 갖는다. 

하지만 가족은 개인과 개인이 만나 이루는 집단이다. 그 집단을 이룸과 동시에 개인이 사라지거나 변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가지는 특성, 기질, 능력은 가족이라는 집단 안에서도 존중돼야 마땅하다.

피터 매카티가 그린 「누렁이랑 야옹이」 속에는 우리가 흔히 만나는 개와 고양이가 등장한다. 그리고 개와 고양이가 흔히 하는 행동들이 평범하게 그려진다. 창가를 좋아하는 야옹이는 창가에서 잠을 자고, 마룻바닥을 좋아하는 누렁이는 바닥에서 잠을 잔다. 모험을 좋아하는 누렁이가 산책길에서 만난 검둥이와 바닷가를 누비며 뛰노는 사이, 야옹이는 집에서 휴지를 풀며 혼자 놀고 있다. 누렁이가 집에 돌아오고, 누렁이와 야옹이는 사이좋게 같이 밥을 먹는다. 그리고 각자가 좋아하는 잠자리로 가 잠을 잔다. 

따뜻한 색감과 필치로 그려지는 누렁이와 야옹이의 하루는 단순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서 더없이 편안하다. 같은 지붕 아래서 누렁이와 야옹이는 개와 고양이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편안함이다. 친구와 뛰노는 것을 좋아하는 누렁이는 바닷가로 향하고, 혼자서 손장난 하는 것을 좋아하는 야옹이는 집에서 휴지를 갖고 논다. 

함께 사는 가족 안에서도 이렇게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의 가족이지만, 그 이전에 한명의 사람이고, 그 사람은 나와는 전혀 다른 특질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이면서 또한 나를 위하는 생각의 방식이다.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이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속상해 하는 것은 결국 내 자신을 갉아먹는 일이다. 타인으로서의 상대를 인정하고 그의 행동을 이해하면 본인의 마음에도 평안이 찾아온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

그렇다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때야 할까. 단지 상대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행복한 가족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그 안에 있는 나 자신을 온전하게 바라보고 세우는 과정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 답을 노인경이 그린 책 「곰씨의 의자」에서 찾아보자.

곰씨에게 의자는 안락한 쉼터다. 곰씨는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시거나 시집을 읽으며 보내는 시간을 사랑한다. 그러던 곰씨에게 두 마리의 토끼가 찾아온다. 탐험가였던 토끼와 무용수였던 토끼는 곰씨의 의자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곰씨의 축복 속에 결혼을 한다. 하지만 곰씨의 평화는 토끼들이 낳은 아이들로 인해 깨지고 만다. 계속해서 태어나는 아이들로 곰씨의 의자는 점령당하지만 친절한 곰으로 살아가고픈 곰씨는 토끼들에게 거절의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토끼들을 앉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의자에 칠을 해보기도 하고, 돌덩이를 얹어보기도, 심지어 의자 위에 대변을 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토끼들의 침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울음을 터뜨린 곰씨는 자신을 위로하는 토끼들에게 어렵사리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는다. "저는 여러분이 좋아요. 하지만 저는 그동안 마음이 힘들었어요. 물론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은 소중해요. 가끔은 혼자 있고 싶어요. 저는 조용히 책을 읽고, 명상할 시간이 필요해요"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선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나를 먼저 돌보고 나를 도닥이는 것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의 힘이 생겨남을 잊어서는 안된다. 친절한 곰이라는 굴레에 자신을 가둔 곰씨는 타인에게 거절의 말을 건네지 못해 자신의 행복을 망가뜨렸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타인을 위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 곱지 못한 시선으로 자신들을 맞는 곰씨를 과연 토끼들은 기쁘게 바라봤을까. 곰씨의 친절은 그 누구의 행복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우선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알뜰히 챙기고, 그 후에 타인과의 관계를 살뜰히 설정해야 모두가 원하는 안정된 행복이 찾아옴을, 곰씨는 많은 실패의 과정을 통해 깨달았다. 

우리 역시 가정 내에서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한번 돌아볼 일이다. 엄마니까, 가장이니까, 나의 행복은 차후에 두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나, 한번쯤 나를 들여다봐야 한다. 나는 이 가족의 구성원이기 이전에, 존엄한 한 인간이고 그에 상응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불만을 꾹꾹 눌러둔 채 가족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가족들에게도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선 온전하게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그리고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작은 선물을 스스로에게 건네보자. 그러고 나면 자연스레 옆에 있는 가족의 얼굴이 보일 것이다. 그 얼굴 역시 내 가족이기 이전에 한명의 인간임을 인정하고 그의 욕구 또한 들여다본다. 나는 누렁이이고, 그는 야옹이이며, 또 나는 곰씨이고, 그는 토끼다. 우리는 모두 함께 한 지붕 아래서, 한 의자 위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나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말하고, 너는 너임을 인정해 줄 때, 안정된 행복은 찾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편안한 상태가 되면 굳이 졸혼을 거창하게 선언하지 않아도 모두가 행복한 가족 속에 내가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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