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주 봉성교회 목사, 논설위원

가짜 뉴스들이 난무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세계에서도 비슷한 양상이다. 그러한 정보에 대한 수요가 있기에,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사람의 눈에는 원하는 것만 보인다는 지적이 말하듯, 뉴스를 대중이 골고루 맛보고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편식하는 셈이다.  

소식들을 취사선택하는 기준은, 곧 그 사람이 품고 있는 세계관과 가치관, 희망이다. 여기에 미흡하거나 어긋나는 기사들에 대해서는 나름 해석하는 틀이 있다. 소극적으로는 아직 덜 다듬어졌기에 정곡을 찌르지 못하는 미흡한 정보라고 평가절하한다. 적극적으로는 반대편에 선 적들이 꾸며낸 음모요 조작이라 무시한다. 그리고, 그 속에는 진실 혹은 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파면되면서 탄핵사건은 종결됐다. 그러나 그 자신도 승복하지 않고 있으며 이러한 모습에 무한신뢰를 보내며 안타까운 반응을 보이는 지지자들도 있다. 박정희에서 박근혜로 이어지던 절대권력이 쇠락했지만 충직한 신민들이 있는 모양이다. 이들은 아직도 왕정시대에 살고 있다. 

언젠가 국제스포츠대회에 응원하러 한국에 왔던 북한 응원단의 모습이 겹쳐진다. 거리에 걸려있던 김정일의 사진이 비를 맞도록 방치된 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마치 살아있는 지도자를 대하듯 눈물을 흘리며 소중히 대하며 거뒀다. 남과 북 사이에서도 극단적인 사고는 비슷한 양상이다. 

촛불시민들에 대항해 스스로 태극기집회라 불렀고 보수를 자처하지만 우리 사회의 극우파들이 극명하게 정체를 드러내는 기회였다. 세계적으로는 극좌파와 더불어 위험하다고 경계되는 생각과 행위들이 대한민국에서는 국가의 중심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흐름을 두려워하고 강하게 저지하려 한다.  

박근혜를 지킨다고 나선 시위에는 노인, 군인, 교인 세 부류의 사람들이 모였다고 꼬집은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 한국의 개신교는 보수정권에 대해 큰 지지를 보냈고 그중에는 그 몰락을 안타깝게 여기는 신자들이 있다는 지적이다. 우리나라는 오늘도 냉전의 그늘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파행적인 신앙이 아직도 재생산된다. 

개인이나 권력에 도를 넘는 신뢰를 보내는 것은 개신교 신앙에서는 우상숭배로 배격돼야 마땅하다. 구약성서에서는 외교 혹은 군사동맹을 통해서 나라를 지키려는 생각을 극히 경계한다. 왕실과 백성 사이에 진실을 바탕으로 형성된 빈틈없는 일치감과 애국심이 나라를 지킨다는 예언자들의 주장이다. 강대국을 끌어들이거나 혹은 무기를 도입해 방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태극기와 더불어 성조기가 등장하는 것도 낯선 장면이 아니다. 혈맹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늘 표현하는 것이 마땅한 의리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러나 조금 물러나 생각해 보자. 조선시대에 명나라 혹은 청나라에 대해 비굴한 태도를 보여주던 조정대신들이 추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참 하나님과 거짓된 우상을 대비하면 이는 곧 현실 인식 그리고 진실에 대한 질문이 된다. 나의 생각과 가치관이 조금도 흠이 없고 굳게 붙잡고 수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아직 부족하거나 정신이 나간 사람일 것이다. 

50여년 전, 하바드 대학의 신학자 하비 콕스는 '세속도시'에서 고착돼 있는 바알 신상과 기동성을 자랑하는 야웨 하나님을 대비시켰다. 우상은 얽매이도록 만드나 참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다는 주장이었다.  

500년 전, 마틴 루터는 천주교에서 파문됐고, 공권력이 더 이상 보호하지 않는다고 황제가 선언했지만 결연히 개혁의 선봉에 섰다. 그리고 성상과 우상의 문제에 답했다. "우상은 우리 안에도, 밖에도 있다. 밖에 보이는 우상이 없더라도, 내 마음이 우상을 품고 있다면 문제다. 밖에 우상이 있더라도, 내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무슨 상관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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