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 문화부국장 대우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이름 짓지 못한 역사'라 아직 빈 채 남아있는 4·3 백비(白碑)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봉기, 항쟁, 사태, 폭동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으나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 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제주4·3이 69번째 나이테를 그렸다. 69번의 동심원은 한결같지 않다. 처음은 행여 숫자를 들킬까 빽빽하게 불규칙한 상처 같은 원을 그렸다. 나이테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1980년대 이후 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1월에 4·3특별법이 공포됐고,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 채택과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뤄졌다. 4·3 발생 66년 만인 2014년 3월 제주4·3사건 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이런 과정들이 하나하나 나이테가 됐다.

1978년 현기영 소설가가 「창작과비평」에 '순이삼촌'을 발표하고, 1987년 3월 이산하 시인이 사회과학 무크지 '녹두서평' 창간호에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실었다. 1992년 강요배 화백의 뭉혼한 제주 민중항쟁사 화집 '동백꽃지다', 1994년 제1회 4·3 미술제 등 일련의 흐름은 빛과 수분이 되어 나이테를 알아볼 수 있는 간격이 됐음을 안다.

4·3희생자유족회는 물론이고 4·3연구소와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 등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친 자신의 노력이 헐벗은 대지와 그 위에 살아갈 사람들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확신하고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나이테를 살피고 나무를 돌본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69년이 흘렀지만 정작 나무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그런 노력들에도 지난해 11월 28일 교육부가 공개한 중고등학교 국정교과서 속 4·3은 5줄 안팎의 짧은 역사에 불과하다. 이 내용만으로 4·3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심지어 그런 가운데 4·3유적지 곳곳에 정체모를 표지석들이 세워져 애써 그린 나이테에 생채기를 냈다. 제주4·3 정립연구·유족회가 세웠다는 이 표지석은 유족은 물론 마을 사람들도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기본 정보를 유지하는 것으로 포장은 했지만 학살 주체를 두루뭉수리하게 표현하는 등 왜곡 의도가 읽힌다. 심지어 제주를 찾은 관광객은 물론 도민들의 SNS 등에 이들 추모표지석이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는 해설과 함께 나돌아 다니고 있다.

범도민을 넘어 범국민위원회가 조직되는 등 내년 70주년을 준비하는 움직임을 보태 의미 있는 작업들이 진행됐다. 올해로 24번째 치러지는 4·3문화예술축전은 그 무대를 관덕정으로 정했다. 4·3의 시발점이 됐던 3·1발포사건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작업이었다.  

왜 관덕정인가. 아직 4·3을 이념논쟁으로 폄훼하는 사정들 앞에 당당히 그 이유를 말하기 위함이다. 3.1절 제주대회에는 '통일 조국'을 원하는 평범한 도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 역사의 한 획이 된 19번의 촛불시위가 그러했듯 크게 의지를 외쳤고 하나로 뭉쳤다. 그 날의 상기는 제주에 켜질 4·3 촛불의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4·3만을 위한 작업은 아니다. 세월호 참사 역시 아직 그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4·16'이란 숫자로 기억한다. 그 날 이후 시작된 숫자가 1000을 넘고 서야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정명을 찾기 위한 마지막 항해를 했다. 아파본 사람이 안다고 제주가, 세월호가 '4월'을 끌어안는 방식은 닮았다. 아니 하나다. 304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대형 해난 사고는 선박회사만이 아니라 그를 방조했던 정부 시스템, 그리고 끝끝내 국가수반의 책임을 물었다. 조금 더디게 멀리 걸어왔지만 이제는 4·3의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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