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진 제주여성가족연구원 정책연구실장

최근 초등학생 딸아이와 함께 1997년 개봉작인 일본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를 다시 보게 됐다. 사실 이 작품은 자연과 인간의 대립을 넘은 공존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필자가 이 영화를 처음 본 20대에는 마을 여성들이 제철노동자로 마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당당한 태도로 남성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이 매우 인상 깊었다. "마을 여자들이 버릇이 없다"는 남성들의 투덜거림에 "좋은 마을일수록 여자가 활기차죠"라고 주인공이 대답하는 장면이 나왔다. 원령공주만 봐도 15세기 후반 무로마치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고 감안하면 500년전 여성상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그 안에 여성들의 행복수준을 좋은 마을의 지표로 삼을 수 있다는 시각은 유독 신선했다. 이번 역시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과연 우리 사회는 그러한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다소 무거워졌다. 

현재 한국은 저출산 현상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매우 높아져 가고 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국가 예산도 막대하다. 

그러나 정부가 그동안 추진해 온 저출산 관련 정책은 그 실효성에 지속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저출산은 어느 하나를 해결해서 풀릴 수 있는 단선적인 문제가 아닐진대 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아직도 많이 부족한 듯하다. 가임기 여성 분포를 담은 분홍색 출산지도를 제작하고 양육수당을 지급하는 것이 저출산의 해법일까. 출산지도는 등장하자마자 공분 끝에 사라졌고, 양육수당은 제시될 때마다 논란을 사고 있으니 이것으로 답은 충분하다.

많은 해외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출산율은 그 사회의 성평등 수준과 정비례한다. 따라서 먼저 여성과 남성이 육아를 함께 고민하고 나눠가야 한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일이 아니라 즐겁고 행복한 일이 돼야 한다. 이와 더불어 기업에서는 장시간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자녀를 돌보는 일에 우선을 둘 수 있는 가족친화적 직장문화가 조성돼야 한다.
제주여성가족연구원에서는 지난해에 '제주형 가족친화마을 모델개발 및 운용방안'을 연구했다. 세대통합 공동체 회복을 통해 아동들의 안전하고 건강한 성장을 지원하고 가족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가족친화마을의 운영 방향이다. 

특히 제주의 수눌음 전통을 근거로 마을 공동육아를 활성화하기 위한 돌봄 이웃공동체 강화를 정책과제로 제시했다. 물론 이 모든 제안에는 양성평등이라는 가치가 전제돼 있다.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남성 노동자와 동등하게 일하고 그 가치를 평가받기 위해서는 그동안 여성의 몫으로 당연시 돼왔던 돌봄노동을 공적 영역으로 확대해 사회적 돌봄으로 재개념화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실현 방법에는 시설 확충만이 아닌 이웃 공동체 회복이 절실히 필요하다. 

'건강가정기본법' 제12조에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명시돼 있다. 5월에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입양의 날, 부부의 날 등 지정기념일도 많다. 

하지만 황금연휴라는 올 5월에 어린 자녀를 둔 직장 다니는 부모 마음은 답답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부모는 직장에서 바쁘고 그 돌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아이들은 학원을 오간다. 부모들은 '이렇게 바쁜 것이 모두 너희들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부모도 아이들도 행복하지 않다. 

저출산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행복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변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단편적인 정책들의 조합이 아니라 교육, 노동, 경제, 주택 등 대한민국 모든 분야에서 개혁에 가까운 변화가 일어나야 할 것이고, 그 변화는 성평등에 지향점을 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저출산은 저절로 해소될 것이고 굳이 5월 가정의 달에 맞춰 거듭 강조할 필요도 없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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