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를 통한 치유의 인문학 4. 영화와 관련한 우리들의 욕망

"좋은 영화가 어떤 영화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성격, 취향, 처지와 상황, 삶의 가치관,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과 과제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란 관객들이 입소문에 의해 가장 많이 본 영화인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다면 관객수 집계가 대중의 영화 선호도의 지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한국영화사에서 관객 동원이 가장 많았던 영화는 1위 '명량'(1761만5057명), 2위 '국제시장'(1426만2198명), 3위 '베테랑'(1341만4200명) 순이다. 이 지표대로라면 한국 영화 중에서 가장 좋은 영화는 '명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선뜻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J.R.R.톨킨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오디세이아'의 주제와 인물이나 서사 구조, 결말의 전형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독일의 민중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 단테의 '신곡',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등이 서사구성의 근간이 되고 있다.

모든 신화의 교훈이 그렇듯이 '절대반지'로 표상되는 물질의 가치와 마법 주문이 의미하는 정신의 가치는 인간 세계의 갈등을 조장하기도 하고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도록 매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이 끝까지 버리지 못하는 건 극단에까지 나아가려는(혹은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그래서 J.R.R.톨킨은 '반지의 제왕 : 두 개의 탑'에서 "우린 계속 나아가기만 하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만 모두 좋은 결말을 맺는 건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해요"라고 경고한다. 

'반지의 제왕'이 소설로서도 성공했지만 영화로서도 2003년 제76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을 비롯 11개 부문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이처럼 영화 '반지의 제왕'에 대한 전 세계 독자들의 찬사와 관심은 인간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반지의 제왕'이 펼쳐지고 있는 공간은 중간계다. 반지의 형상이 그렇듯이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 진공의 공간에서 떠돌고 있는 존재다. 그러면서 단단한 사회적 틀에 갇혀 있다. 그렇게 거대한 원형감옥(반지)에 갇혀 있으면서도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건 존재의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꿈을 꾼다는 것이다. 

키가 작아도 왕이 될 수 있으며, 배우지 못해도 지혜로울 수 있으며, 우연한 계기로 인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모든 꿈꾸는 것들이 영화는 실제로 구현해 보여준다. 이야기로서만이 아니라 편집, 시각효과, 음향, 음악, 의상, 미술적인 장치를 통해서 말이다. '반지의 제왕'은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미덕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은 셈이다. 인간이 갖는 욕망 즉, 최선의 보상, 최다(극과 극)의 경험, 최장의 시간을 살아보고 싶은 소망을, 인간이 만들어낸 테크놀로지의 진보를 통해 실현해내고 있다.

영화의 근본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반지의 제왕'처럼 서사가 긴박하고 스펙터클한 이미지들이 속도감 있게 흘러가면서 어떤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가 있는 반면 정반대의 영화들도 있다. 서사보다는 이미지, 긴박감보다는 느린 속도, 선명함 보다는 모호함, 시간의 선형성을 위반하고 인물의 정체성을 겹쳐 혼란스럽게 하는 모종의 영화들이 꽤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영화들이다. 

"저는 당신의 영화 '거울'을 봤습니다. 영화 속의 인물들, 사건, 그리고 회상의 장면들을 서로 연관시켜 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 시간이 지난 후에는 두통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끝까지 다 봤습니다. (중략) 그러나 당신의 이 영화 '거울'을 난 우선 이해하지 못합니다"

타르코프스키가 자신의 저서 「봉인된 시간」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영화 독자의 편지다. 독자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거울'(1975)을 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당황스러움을 토로하면서 영화감독에게 왜 그런 영화를 만들었냐고 항의하고 있다. 충분히 공감되는 의견이다. 그런데 장 뤽 고다르 같은 영화감독은 '그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기적으로서의 체험'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참으로 당황스러울 수 있으리라. 또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된다. 영화란 무엇인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거울'은 시간과 색깔, 소리, 역사성과 현실성, 개인의 역사와 공적 역사, 실제인물과 배우로서의 인물 등 혼재된 이미지들의 순환구조를 보여준다.

스토리는 나(알로샤)와 어머니, 아내와 아들을 둘러싼 과거와 현재를 다루고 있다. 즉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딱히 사건이라고 할 것은 없고 단편적인 기억들이 교차 편집되는 형식을 취하면서 '틈'을 형성하고 그 틈에서 사건의 퍼즐 맞추기를 시도하게 유도한다. 그리고 대사보다는 이미지가 사건과 인물이 감정을 대신하고 있다. 화자를 둘러싼 관계의 핵심 갈등의 배경이 2차 세계대전과 관련 있을지 모른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 지극히 이기적인 유전자

어쩌면 이런 영화를 읽는 독법의 비결은 제목에서 힌트를 얻어야 할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 '거울'이다. 거울은 재현과 모방의 물질이다. 하지만 재현되는 존재의 그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는가. 드러냄 속에 감춰진 게 너무 많은 게 거울이다. 어쩌면 존재의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거울을 깨고 그 속으로 들어가면 그 모든 것이 보이는가. 실제의 거울은 그럴 수 없지만 영화라는 거울은 그것이 가능하다. 영화는 꿈 속으로 데려가 주기도 하고,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기도 하고, 들리지 않았던 소리를 듣게 할 수도 있으니까.

타르코프스키는 그런 것들을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구성으로 현실화시켜내고 싶었던 게 아닐는지. 그는 낮에 꾸는 꿈(영화)을 통해 어둠의 저 너머, 사물의 물컹거림 속으로 들어가 그 실제를 손으로 잡아 보여주고 싶은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힌 감독이었을지 모른다. 그가 읽어낸 세상은 모순된 것들의 중첩이며 삶이라는 단면에 층층이 화석화된 시간의 통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간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꼬리를 붙잡고 기억의 창고를 헤집고 다녀보는 것이 아닐는지. 그래서 타르코프스키적 영화를 보면 알 수 없는 이미지들에 호흡이 정지되고, 숨소리 너머로부터 서서히 기억의 풍경과 소리들이 발화된다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고체화된 감정이 스멀스멀 풀어헤쳐지면서 묘하고도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반지의 제왕'과 같은 서사적 영화가 일으키는 감정의 파고와 강도는 극단적으로 깊고 빠르게 희망을 추동하게 한다면, '거울'과 같은 시적 영화는 느리면서 모호하게, 그러나 오래도록 나는 누구인가의 물음에 천착하게 한다. 그러니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닌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영화에 대한 선호도는 달라지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세계에 대한 하나의 텍스트다. 삶의 총체적 시간을 소설적으로 혹은 시적 영상으로 써내려간 텍스트 말이다. 영화가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는가'는 영화감독이 이 세계에 대한 물음의 방법론적 서술이다. 독자에게 욕망이 있다면,타인의 사유와 그 흔적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앞당기고 싶은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인 유전자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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