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홍석 전 동국대교수 겸 학장·논설위원

채(蔡)명신장군은 파월(派越)사령관으로, 국제적 명성을 높여왔다. 이때를 기해 군의(軍醫)관에게 미국영주권을 부여하면서 '이민길을 열어온 공로자'로 인정받게 됐다. 그만큼이나 한미관계에서 신뢰와 더불어, 돈독한 우방으로 발전하는데 기여해왔다. 하지만 수명한계를 안는 것이 인간임으로, 용감한 장군이더라도 이런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해왔다. 

채장군은 생애를 통해 '파병사령관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국가위상을 대내외적으로 높이는데 기여해왔다. 이것만으로도 큰 공적이며, 민족의 자부심을 키워온 처지였다. 여기에다 사후(死後)에는 모든 특혜까지 내려놓으며 '사병묘역에 안장(安葬)'해왔음으로, 다중(多重)에 걸친 업적을 남겼다. 국민들이 높게 평가하며 존경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었다.   

국가에서 부여하는 특혜마저 내려놓고, 사병들과 '전우관계를 유지'하려는 박애정신이며, 실천을 앞세워온데 따른 것이다. 요즘에 흔하게 회자되는 '갑을(甲乙)관계를 비판'하면서도, 막상 자신에 대해서 외면하는 것이 일반추세다. 지도자들마저 공개적으로는 '애국애민(愛國愛民)을 강조'하면서도, 실제상황은 그렇지 않은데서 '표리부동한 모습'들이다.    

신성시하는 현충원에는 '묘역(墓域)'을 넷으로 구분해 놓았는데 대통령과 국가유공자묘역, 장군과 사병묘역이 그것이다. 이들 묘역들은 규모와 장예방법에서, 서로가 다름으로 신분제도에 따라 예우까지, 차별해온 '전통사회'를 재현한 느낌을 주고 있다. 사병묘역의 경우 한 평(坪)에 불과한 넓이다. 그런 까닭에 '화장(火葬)방식'을 적용하지 않고, 매장할 수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차별성을 인정하면서도, 채장군은 '정부가 보장하는 특혜'마저 내려놓고, 사병묘역을 선택하려는 유서를 남겼다. 용단과 포용력에 국민들이 감동하고 있다. 화장(火葬)문화는 시신을 불태우는 방식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을 '두 번이나 죽인다'는 오해와 함께, 거부감에 젖어있다. 뿐만 아니라, 자손번영을 위한 명당안치와 부활(復活)을 믿는 신앙심에도, 화장방식은 부정적이다. 이런 제약들을 극복하고 '화장을 수용'한 일이야말로, 선구자위치에 서지 않고서 불가능하다. 

세상은 평등을 내걸고 있지만, 실제는 이와 반대임으로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이다. 오히려 권력과 이익을 챙기는데 혈안(血眼)이 되어왔음으로, 고깃덩이에 눈을 밝히는 '독수리와 닮은 모습'이다. 이에 비하면 채장군은 신선(神仙)처럼, 떼가 묻지 않은 고귀한 자태다. 근본으로 돌아갈 때, 초임지에서 제주출신사병들이 안겨준 감동이 크게, 작용한데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내가 겪은 전쟁」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나온다. '4월10일에 9연대소대장으로 부임했는데, 4·3사건이 발생한 직후였으며, 그때 부대원들은 적개심(敵愾心)으로 가득 차있었고, 2개월 뒤에는 연대장마저 암살당했다'라고. 상황이 이렇게 험악함에도 북한에서의 탈출과 입대로 이어진 인생역정을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이런 진심이 부대원들에게 감동을 줬는지, 동화(同化)흐름과 함께 추종세력을 낳게 했다. 선입견(先入見)이 '올바른 판단'까지 흐려놓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냇가에서 목욕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어디에서인가 '날아오는 총탄'까지 부대원들이 앞장서 막아줬음으로 '참다운 전우(戰友)애'가 어떤 것인지, 여기에 대해서 실감하게 됐다. 이런 점에서 제주도에서 창설된 9연대야말로 장군에게 '해탈의 경지'로 안내하며,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시범을 보여온 '원효대사의 환생'을 보는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바탕에 제주출신사병들이 '순수한 충정'이 깔린데 따른 것임으로, 이런 사실을 주변에 알리는 것은 물론 후속세대에게, 귀감(龜鑑)으로 삼아야 할 사항임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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