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12.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일본군 성노예 생활…외국인 포함 20만명 이상 예측
범죄행위로 위안부 포섭…일본 정부 등재 저지 총력
9개국 15개 단체 기록유산 신청…진행과정 4·3 교훈

꽃처럼 곱던 소녀는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제국주의 일본에 끌려가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하는 등 모진 삶을 살았다. 채 피어보기도 전에 시들어야 했던 소녀들의 이야기는 세계인들의 공감을 얻었고 지금은 공감의 흔적을 역사에 남기기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일본군 위안부란

일본군 '위안부'란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후부터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1945년까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설치한 '위안소'에 동원돼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말한다.

일본군 '위안부'는 국가가 여성을 다양한 방법으로 동원해 강압·지속적으로 집단적인 성폭력을 가한 것이고 피해여성들은 삶의 조건이 '노예'와 같은 상태였다는 점에서 현재 UN 등 국제사회에서는 성노예(military sex slavery)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 필리핀인 등 외국인을 포함해 약 20만명으로 예측됐지만 일부에서는 그 이상을 넘나드는 수의 여성이 '위안부'로 군에 배속됐던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위안소는 군이 직접 경영하는 위안소, 민간에 경영을 맡기는 군 전용 위안소, 민간의 유곽 등 군이 일시적으로 지정해 이용하는 위안소 등의 유형이 있다. 군 위안부 제도의 창설, 유지, 운용의 주체는 일본군이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유괴되거나 속아서 '위안부'가 됐다. 이러한 범죄행위를 일본군이 조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일본 정부와 일본군에게는 중대한 책임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됐다가 살아남은 여성들은 귀국도 여의치 않았다. 일부 귀국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현지에 버려지다시피 했다. 일본군이 패전 후 '위안부'를 살해하는 일도 있었다. 피해 여성들은 '돌아갈 방법을 구하지 못해서', '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어서' 등의 이유로 타국에 눌러 앉는 경우도 많았다.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귀국 후 심각한 육체적·정신적 후유증으로 고통 받았다. 구타 및 가혹행위로 인한 외상, 불임, 성병 등 직접적인 후유증이 오랜 시간 피해자들을 괴롭혔다.

또 자신의 몸에 대한 자결권을 가지 못했다는 모욕감, 피해 사실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 받아야 할 불이익과 낙인에 대한 두려움, 삶의 패배감, 우울증 및 불면증 등의 심리적 외상 등으로 힘겨운 삶을 이어갔다.

피해 사실 때문에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하지 못하고 가족제도에 편입되지 못한 피해자는 빈곤의 악순환에 몰리기도 했다.

△ 공감의 흔적을 역사로

1991년 8월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에서 본인이 일본군 위안부의 피해자임을 당당히 밝힌다. 1990년 6월 일본 정부가 "일본군은 군대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폭로하고 피해 실상을 공개 증언한 것이다.

처음 한 여성의 작은 목소리에서 시작된 문제는 지금 당당하게 여성인권을 주장하게 됐다. 세계의 시민들이 이 목소리에 공감했고 공감의 흔적을 역사에 길이 남기려고 하고 있다.

2016년 5월 한국과 중국, 타이완, 일본, 네덜란드,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의 시민단체가 중심이 돼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를 신청한다.

등재를 신청한 자료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관한 공문서 및 사문서 563건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문서 1449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해결 활동 기록물 732건 등 모두 2744건이다.

△ 기록유산 등재 저지 나선 일본

이 같은 움직임에 일본 정부는 총력 저지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물의 기록유산 등재가 추진되자 일본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올해 유네스코 분담금 38억5000만엔(한화 420억원)의 지급을 보류했다.

현재 유네스코 예산의 분담 비율은 미국(22%)이 가장 많고, 일본(9.6%)·중국(7.9%)·독일(6.3%) 등이 뒤를 잇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2011년 팔레스타인이 유네스코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분담금을 내지 않고 있어 현재는 일본이 최대 분담국이다.

△ 위안부 기록물 등재가 주는 교훈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기록유산 등재 추진 과정은 제주4·3에도 교훈을 준다.

2013년 10월 공청회를 통해 한국여성가족부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방침을 결정한 이듬해 11월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위안부 피해자 지원 및 기념사업단이 발족돼 공동등재를 위한 기본계획을 수립한다.

이후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 목록 작성, 관련 단체 간담회, 한국위원회 및 국제연대위원회 결성, 기록유산 공동등재 신청서 사인회 등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을 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한다.

노력이 결실을 맺어 지난해 5월 9개국 15개 단체 및 기관 명의로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서 접수를 완료한다.

이 같은 진행 과정은 '제주4·3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라는 목표만 정해졌을 뿐 구체적인 등재 대상이나 계획, 방법 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4·3이 배워야 할 것이다.

위안부 기록물은 조선통신사 기록물과 마찬가지로 '국제공동 등재'를 통해 신청을 마쳤다. 문화재청 공모와 한국위원회 심사 등의 과정이 생략된 셈이다.

이는 대만2·28과 기록유간 공동등재를 위한 연구사업을 추진키로 한 제주4·3이 참고할 부분이다.

제주4·3 70주년까지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동안 음지에서 숨죽여 지내던 제주의 역사는 수많은 도민의 노력으로 양지에 나오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이제 빛을 보기 시작한 제주4·3이 찬란한 빛의 역사로 남아 세계인의 가슴에 아로새겨지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제주가 진정한 화해와 상생의 평화의 섬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섬의 아픔 함께하는 '제주 평화의 소녀상'

전국 27번째 방일리공원 건립

제주의 강한 바람에도, 비 날씨에도 소녀는 흐트러짐이 없다.

제주시 노형동 방일리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진 것은 지난 2015년 12월19일이다. 전국에서는 스물일곱 번째 평화의 소녀상이다.

소녀의 그림자는 제주의 돌, 현무암으로 만들어졌다. 발치에는 제주4·3 희생자들을 상징하는 붉은 동백꽃잎이 선연히 떨어져있다.

소녀들의 아픔과 제주섬의 아픔이 다르지 않음을, 함께한다는 것을 뜻한다.

제주에 자리 잡은 소녀는 4·3 희생자를 위로하며 아직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일본 정부의 법적 사과를 요구하며 작은 두 주먹을 굳게 쥐고 있다.

평화의 소녀상이 선 자리는 원래 소녀가 서려던 곳에서 1㎞ 남짓 비켜나 있다.

제주평화나비와 4개 대학 학생들이 꾸린 '제주, 대학생이 세우는 평화비 건립추진위원회'는 애초 소녀상을 노형동 주제주 일본총영사관 앞에 세우려 했지만 제주도와 제주시청이 외교상의 이유 등을 내세워 불허했기 때문이다. 

수개월간 싸우다 '광복 70주년'에 맞춰 2015년 소녀상을 세우겠다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의 약속을 생각해 학생들이 한 발짝 물러섰고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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