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주 봉성교회 목사·논설위원

"베트남 정부와 베트남 인민에게 한국 국민으로서 사죄드립니다." 이채로운 일인시위가 시작되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대표 윤미향이 월남 대사관 앞에서 사과의 뜻을 담아 분명히 사과한 것이다. 시위는 릴레이로 계속 이어지리라 한다. 일본이 저지른 잘못을 오랫동안 추궁해 온 할머니들도 적극 동조한다고 알려졌다. 우리의 파월장병들이 베트남에서 행한 민간인 학살과 성폭력을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를 고마워하는 베트남인들의 반응도 보도되고 있다. 

이제 반세기가 지난 일이다. 자유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은 베트콩 오만 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반면, 우리의 희생은 오천 명이었다. 그러나 10:1의 압도적인 전적이 마냥 자랑스럽지는 않다. 여러 마을에 따이한 병사들의 무자비한 살상과 폭력을 잊지 말라는 증오비가 서 있다. 

해방 이후 북한 지역에서 공산당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가족이나 친구들이 죽임당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월남한 이들은 반공의식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 증오심은 평생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 중에 후일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과 이세호가 있었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개신교 신앙인으로 자라났으며, 대표적인 대형교회에서 장로로 임직받았다. 하지만, 원수사랑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한국 교회의 주류 보수층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월남전의 영웅들이 육사를 2기 혹은 5기로 졸업하였는데, 임관되면서  바로 배치된 곳은 제주도 제9연대였다. 그리고 4.3사건의 현장에서 중대장 혹은 소대장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들에게 제주 학살의 큰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생각은 당시 지휘관들과 거의 같았다고 보인다. 비정규전이라는 점에서 제주와 월남의 비극은 20년의 시차를 넘어서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적이 아니라는 완벽한 증거가 없으면, 일단 의심하여야 한다. 그 와중에서 비무장 민간인들이 너무나도 쉽게 목숨을 잃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이 최근에 다시 고조되면서, 소문과 추측으로만 떠돌던 이야기들이 점차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당시 미국의 보고서에 따르면, 신군부 진압군은 광주시민들을 베트콩처럼 취급했다고 한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백마부대와 맹호부대에서 대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인명을 살상하는 일을 두고서 양심은 무디어졌고, 권력을 목표 삼고 민간인에게 총을 겨누는 사태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월남과 광주의 시차는 불과 10년 정도이다. 

광주에서 자라난 벗들과 이야기하다가, 항쟁에 대한 의견을 물어본 일이 있었다. 벌써 20년이 지난 일이며 국외에서 공부하던 때였다. 그럼에도 분위기는 조심스러웠다. 정부와 군에서는 희생자가 이백 명을 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소문을 통제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시민들은 이천 명을 넘는다고 주장하곤 하였다. 누구도 섣불리 단언하지 못했는데, 나는 천 명 가까운 숫자가 아닐까 추측하였다. 기계적인 중립을 취하며, 평균을 낸 것이다. 설마 천 명을 넘을까 하는 생각으로.  

집계된 통계로는 현재 팔백을 넘는 희생자를 헤아리고 있다. 당시 급히 매장한 곳들이 드러나면서, 숫자는 꽤 불어나리라고 예측된다. 진실이 밝혀지는 일은 반갑지만, 참혹한 현장과 역사적 사실을 대하는 것은 두렵기도 하다. 정의로운 화해의 길도 아직은 아득하기만 하다.

그 자리에서 후배가 하던 이야기가 늘 귀에 남아 있다. "바닥에 있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 같아요. 사태가 진정된 후에 유흥업소의 여성들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거리에서 흔히 넝마주이들이 있었는데, 모두 사라진 깨끗한 거리가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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