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병찬 서예가·논설위원

오늘도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의 숲에서는 아침 이슬이 불러오는 해맑은 햇살을 받으며 여기저기서 제 목소리를 뽐내는 듯 요란하게 조잘대는 새들의 합창소리가 귀뚜리의 협주곡에 맞추어 한 서예인의 늦잠을 일깨웠다. 

언제나 하는 일이지만 오늘따라 남들과 같이 무르익은 가을의 즐거움을 찾아 편하고 재미있는 생활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 않으나 이 사람은 곶자왈 틈에 혼자 파묻혀 있으면서 무엇을 해보고자 닥모르 "먹 글이 있는 집" 한 구석에 쳐 박혀 있으면서 먹통 속에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다 보니 하루해가 다 기울어가고 있다. 그러니 이 닥모르에 와서 살아온것도 벌써 열다섯 해가 된 것 같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못할 정도의 원시림 같은 곶자왈이었다. 집터를 마련하고자 하여 숲속에 들어가려고 해도 가시나무랑 덤불숲이 가로 막았었고, 겨우 들어가 보니 경사가 심한 돌 언덕이며 자갈밭이라 농사도 짓기 힘든 땅이었다. 멀리 보이는 한라산은 솥두껑 자루마냥 작은 오름 같았고 바다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 분지라서 실망이 컸었는데 집을 짓고 살다보니 하나 둘 정이 들고 마음도 편하게 두게 되어서 호강스런 생활터전이 되고 있다. 

옛날은 여기가 목장지대라서 소도 방목하여 기르고, 작은 돌담 틈에서 자라는 소먹이 청초도 베어가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여러 장르의 예술인들로 하여금 낭만이 짙은 마을을 이루고 있어 낮에는 잠시 찾아드는 꿩과 벗하고 밤에는 노루와 벗하며, 그리고 야생식물들의 순박한 모습이며 소담스런 들꽃들과 더불어 크고 작은 곤충들과 담소를 나누는 재미 속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나만의 풍요로움으로 살고 있다. 

앞뜰 한 쪽에 마련한 텃밭에는 배추랑 무랑 시금치랑 고추도 심어서 가꾸고 부추랑 돌나물도 심어서 싱싱한 채소가 필요할 때마다 마음대로 자급하는 재미 또한 풍성하다. 또한 이곳저곳에 심어둔 유실나무들이 주축이 되어 봄이면 매화 앵두꽃 배꽃 벚꽃 목련 그리고 유채꽃들이 화창한 봄의 들판을 수놓은 야생화들과 어우러져 귀엽게 반겨주었고 초여름이 되어 가면 철쭉을 비롯해서 귤꽃이며 밤나무 꽃이며 감꽃들이 머지않아 튼실한 열매로 맺어질 자태를 뽐내며 자신의 꽃으로 아름다움을 장식해 주고 있다. 가을에는 코스모스를 비롯해서 배롱나무꽃과 상사화 국화 그리고 겨울이면 비파꽃 동백꽃 수선화들이 아름답고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계절마다 알알이 여물어가는 과일들이 사랑스러움을 더해주고 있으며, 요즘은 잘 익은 밤을 수확하면서 다시 한 번 풍요를 느껴본다. 

집을 멀리하고 산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오직 나의 예술을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자 하는 일과에서 보다 나은 예술작품을 찾고자 함이다. 백남준은 낡고버려진 전자제품을 화려한 영상과 네온으로 꾸며 화려하고 위풍당당한 '거북선'을 탄생시켰다. 신지 오마키는 실재와 정신의 교차점을 염두에 두고 자연과 인위적인 공간의 경계를 이어가는 인간과 사회의 관계 등 이분법적인 관계들을 자신만의 시적인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감성을 자극하는 작품을 선보여 왔다. 이들의 행적을 보면서 예술가의 창작성은 삶의 영역에서 분출시키는 작업임을 읽어보기도 한다.

예술가는 고행을 즐기며 자신의 작품 창작에 몰두하는 사람들이다. 남들이 즐기는 편한 시간도 멀리하고 밤잠도 설쳐가며 자신의 예술혼을 갈고 닦는 일에 땀을 흘리며 즐기는 사람들이다. 그 고행길이 험난할수록 작가의 몸부림은 더욱 강열해지게 되며 여기에서 탄생되는 작품의 예술성은 더욱 더 진하고 새로운 육감이 전해지도록 돋보이게 마련이다. 

이왕 한 구멍을 파기 위해서 이곳에 왔으니 우리 제주민요에 나온 구절같이 "죽엉 가민 썩어질 궤기 산 때 미영 놈이나 궤라"라는 말을 생각하며 오늘도 붓과 씨름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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