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홍석 전 동국대교수 겸 학장·논설위원

망양지탄(望洋之嘆)이란 글귀가 전해져왔다. 넓고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감탄해온데 따른 것인데 '청명(淸明)한 가을철'에, 이런 정경은 들어난다. 강변에서 살아온 하백(河伯)으로서, 이런 정경마저 인식하지를 못하고, 세상에서 넓은 것이 오직 '황하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보다 넓은 북해(北海)'를 확인하면서, 다른 세상에 대하여'환경을 지각(知覺)'하게 되었고, 현장에 대한 확인단계로 발전해갔다.    

호수위에 던진 돌멩이가 파문(波紋)을 일으키며 '수면위로 확대하는 원리'와 같은 것이다. 인간의 경험무대도 처음에는 태어난 곳에 한정된다. 이후 외부를 향한 '점진적 확대과정'을 통하여, 5대양6대주를 누비게 되며, 글로벌시대에는 모두가 여기에 다가가게 되었다. 심지어 우주탐사단계에 이르렀음으로, 시대변화와 더불어 활동무대까지, 넓혀온 것을 의미한다.   

동해안에는 예전부터 망양정이 세워져있다. 넓은 바다를 내다보기 위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관(柳灌)은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겼다. '큰 바다는 넓고 넓어 하늘에 닿을 듯 멀고, 장강(長江)은 출렁출렁 성을 끼고 흘러간다'라고. 수평선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까마득한 것이 바다임을 보여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성(城)을 끼고 흘러가는 큰 강물마저, 넘치지 않게 '수용하는 것이 바다'란 점이다. 

육지에서 흘러오는 강줄기들을 모두, 수용할 정도로 바다는 넓다. 그만큼이나 바다는 '지구의 2/3를 점유'할 정도임으로 '포용(包容)성을 보이는 상징물'로 여겨왔다. 분포마저 적도남쪽에 집중됨으로써 '물이 많다는 뜻'으로, 남반구를 수반구(水半球)로 통용해왔다. 제주도는 바다로 에워싸여 있다. 환해고도(環海孤島)로 표현해온 것도 여기에 근거하며, 이런 조건을 앞세워 '유배지로 활용'해왔다.  

유배지는 '폐쇄된 공간과 등식'으로 통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을 자유롭게 나르는 '백구(白鷗)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처지다. 넓은바다를 두고도 자유롭지 못한 '야인(野人)의 심정'을 그려내기에 알맞은 장면이다. 현대에 들어와 제주도에 피난해왔던 이중섭화백도,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무대장치로서 생계를 꾸려가는 고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간(幕間)에는 고달픔을 달래기 위해서, 작업장에서 가까운 "소남머리"를 찾고 있었다. 

이곳이 정방폭포로 이어지는 해안절벽(sea cliff)이며, 한때 '전망대(展望臺)가 조성'될 정도로, 넓은 바다를 바라보기에 알맞은 곳이다. 거기에는 순박한 아이들과 풀을 뜯는황소까지 있었음으로 '화폭에 담기에 알맞은 소재'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서귀포해벽의 경우, 이화백의 고달픔을 달래주던 휴식처가 되었다. 최문희의 장편소설 "이중섭"에도, 이곳에 관한 글귀가 나온다. 
'그건 남색의 짙푸른 수평선이었고, 죽은 자와 산자를 가르는 시간의 문턱이었다. 정방폭포의 물줄기는 사위였고, 멀리 떨어진 섭섬 너머로, 부연 청띠가 가물거렸다'라고. 한참이나 세월이 지난 뒤며, 이화백이 타계해버린 상황이었음으로, 예전을 추억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일본국적의 부인에게, 모든 것이 '흐릿한 안개'처럼 비쳐지고 있었다. 악몽을 잊기 위한 방편이며, 삶과 죽음의 한계를 '수평선(horizon)에 비유'한 것이었다. 

이제 해녀들이 '피안(彼岸)의 세계'로 여겨왔던 이어도마저, 과학기지로 변하는 시대를 맞으며 '피안과 차안(此岸)의 구분'마저, 없어지게 되었다. 제주도민들도 대양(ocean)처럼 넓은 마음을 키우며 '바다를 무대로 삼고 번영을 누려온 영국'을 떠올리게 되었다. 보다 넓은 세상을 열기 위해, 고통의 세월을 잊는 대신 바다를 통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기 위한 방법'에서다. 이를 위해 전망대조성과 더불어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넓은 도량과 힘찬 용기를 배양해나갈 때인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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