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10월에, 시월애(詩月愛)

어쩜 이리도 야속한지. 왔다는 기척도 없이 숨을 죽이던 계절이 서둘러 갈 채비를 한다. 가을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멀리 눈인사만 하고 지나가는 듯 섭섭하다. 어느 시인이 자신의 시집에 끄적인 말처럼 '나를 가련히 여긴 어떤 이가 기별도 없이 보내준 소포'가 마냥 하무뭇하다.

△글을 쓰다 문학하다

'글을 쓴다'는 말, 문학이란 말 들으면 까닭 없이 가슴부터 설렌다. 언젠가 시화전을 준비하며 몇 날 밤을 지새웠던 감각이 불현 듯 일어난다. 분명 내 안에 있던 것들이나 알지 못했던 것들이다. 심지어 9월 '문학주간'이라는 제법 묵직한 소포를 받았던 것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10월이라 쓰고 문학 특유의 깊이를 더듬는 자리도 마치 남의 일처럼 데면데면하다.

문학을 한다는 말이 주는 묘한 이질감 때문이다. 뭔가 있어 보이고, 거리가 느껴진다는 고정관념이 만든 자발적 불편함이다. 그런데도 '글쓰기' 붐이다. 습작을 위해 마음 맞는 이들이 모이고, 문학이 목적인 공간들도 생긴다. 곱씹어보면 특별할 일도 아니다. 사람 사는 것이 다 비슷비슷해 집들이 모이면 상점가가 생기고, 좋은 풍광에 사람들이 모이면 커피숍이며 식당이 다닥다닥 자리를 챙긴다. 사실 문학에 마음이 동한 사람들을 따라 생기는 것들은 부끄럼이 많아 대놓고 얼굴을 트지도 않고 간신히 통성명을 한다.

요란하고 화려한 것들 사이 이런 것들이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하며 위안이 된다. 팔리는 글을 위해 타인들이 만들어놓은 공식을 따지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 '쓰다'라는 다소 번거로운 수작(手作)은 종종 또 다른 나와 만나는 통로가 된다.

△ 고치고 또 고치는 인고의 시간

불쑥 '시(詩)'를 던졌지만 무엇을 쓰든 문학은 작지만 뭔가 한다는 용기와 감정과 경험에 충실하고 고치고 또 고쳐가는 인고의 시간을 품고 있다. 그럼에도 '예술을 하느냐' '예술 좀 아느냐'는 질문에 선 듯 문학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잠깐 숨을 돌려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잘 맞는 옷을 입은 듯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대놓고 '사랑에 빠졌다'를 외치는 흔한 러브송이 유독 달콤한 것과 비슷한 이치다. 알지 못하는 사이 우주 공간에 빨려 들어가 내 별이 아닌 다른 사람의 별을 방문하고, 뭔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지만 순간 원래 그랬던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문학이다. 이미 나도, 너도 다 알고 있는 것들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노래했던 시인의 습작 노트에서 "…한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나를 부르는 것이오//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치에는/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텐데…//나를 부르지 마오"(윤동주 '무서운 시간')하는 '어진'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문학인지도 모른다.

△ 가을의 속도, 언어의 온도

직수굿하니 익어가는 계절, 가을의 속도와 언어의 온도는 닮았다. 문학은 삶  이란 전시장에 내걸린 '언어'의 조합이다. 누군가는 덕지덕지 두꺼운 마티에르로 감정을 숨기고, 누구는 속이 환히 내비치는 투명한 물빛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같아 보이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표정을 감추는 판화도, 수백 수천번의 칼질로 윤곽을 잡아내는 조각도, 어디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변화무쌍한 입체로도 나타난다.

어떻게 읽어내는지는 오로지 보는 사람의 몫이다. 행간에 오롯한 섬의 지난한 역사와 아픈 상처, 지청구 같은 읊조림에 울컥 눈물이 솟는 이유를 강요할 수는 없다.

아직은 '베스트셀러'편식을 고치지 못한 사정을 굳이 감추지 않겠다. "글은 여백 위에만 남겨지는 게 아니다. 머리와 가슴에도 새겨진다. 마음 깊숙이 꽂힌 글귀는 지지 않는 꽃이다. 우린 그 꽃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는다. 때론 단출한 문장 한 줄이 상처를 보듬고 삶의 허기를 달래기도 한다"(이기주 「언어의 온도」  '긁다, 글, 그리움' 중에서)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마냥 푼더분하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