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문철 전 제주도교육청 교육정책국장·논설위원

오늘날 우리는 다양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한 특징과 특성은 사회문화적 현상 속에 고루 녹아들어 있다. 또한 오늘날은 정보의 유통이나 환류가 활발하여, 어떤 문화적 기류가 형성되면 그것은 다양한 미디어를 타고, 마치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를 입증이나 하듯 곧 온 나라 안팎으로 확산된다. 

어느 시대건 그 시대의 사회문화적 특성에 순응해가며 즐기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이들과는 달리 갈등을 겪는 부류가 있게 마련이다. 우선 전자의 부류는 저들이 성장해오는 동안 이질적 문화를 경험하지 않았기에 현재와 같은 문화 환경 속에서 길들여진 세대다. 따라서 눈앞에 전개되는 다양한 문화 환경에 갈등이나 거부감이 없다. 그런가하면 오늘의 현상과는 다른 문화 환경 속에서 생애의 절반 이상을 보낸 부류는, 천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다양한 문화적 현상에 거부감이나 이질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후자의 부류는 현실적으로 이질적인 문화에 맞닥뜨려 있으면서도 그들의 내재적 의식은 타성과 관성(慣性)의 범주를 떠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이질적인 두 개의 문화 환경에 참여는 하나 그 어느 쪽에도 제대로 소속되지 못한 채, 이른바 '주변인(marginal man)'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또 두 문화의 경계 언저리에서 어정쩡하게 방황한다하여 경계인, 한계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바로 여기에 갈등(葛藤)현상이 나타난다. 칡(葛)과 등(藤)이 오손도손 한데가면 좋으련만,끝까지 서로 마주보고 엇갈려가니 배배 꼬일 수밖에 없다. 세대차라 불리는 두 부류간의 갭(gap)이 노정(露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문화권의 공존을 위한 지혜는 무엇인가. 우선은 '이해와 수용(受容)'이다. 이해(understand)란 어쩌면 자신이 '낮은 위치(under)에 서서(stand)' 상대를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럴 수만 있다면 비로소 우리는 상대를 수용할 수 있다. 갈등이란 결국 상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싹트는 것이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시쳇말로 다름은 틀림이 아님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다름도 인정을 받기 위해선 반드시 타당성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타당성이 없다면 다르다는 것 자체만으로 어떤 명분을 삼을 수는 없다. 

또 하나는 '고정관념의 탈피'다. 고정관념은 번번이 남을 구속하지만, 결국은 자신마저도 구속하게 되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사슬'이다. 고정관념을 벗어던지고 나면 우리는 너무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내 사상의 반경이 무한의 세계를 향해 확장되어 나갈 수 있다. 여기서「인간은 저마다 자기시야의 한계를 마치 세계의 한계로 간주한다.」고 갈파한 쇼펜하우어가 우리를 더욱 채근한다. 

끝으로 '소통과 참여'를 생각한다. 우리가 매사에 경계인으로 밀려나지 않으려면 되레 활발한 참여로 맞설 일이다. 이를 통하여 상호 공감대를 확대하고 사상과 문화의 공유를 도모해 나가야 한다. 우선 작고 쉬운 것부터 접근을 시도해 보자. 의식과 가치, 환경과 세대를 초월한 문화공동체야말로 새로운 도약을 위한 또 하나의 에너지원이 아니겠는가. 신세대는 우리의 적이 아니라 동반자이다.  

우리가 이 시대의 주변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어려운 일일 수도, 쉬운 일일 수도 있다. 어떻게 하면 어려워지고 어떻게 하면 쉬워질 것인가. 우리 안에서 그 해법을 찾자. 우리에게 보석 같은 지혜와 경륜이 있다면, 저들에겐 활화산 같은 용기가 있음에 주목하자. 저들에게 '밀려나는 주변인'이 아니라, 되레 저들을 '밀어주는 주변인'으로 살 수는 없을까. 어느 쪽이 됐건 선택은 우리들 몫이다. 어차피「인간은 B(birth)와 D(death)사이의 C(choice)이다.」사르트르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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