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 걸스로봇 대표·논설위원

23일 저녁 여섯 시부터 크리스마스 이브 새벽 네 시까지 마라톤 회의를 했다. '긱스카우트'라고 이름을 붙인 '걸스로봇'의 장학생 친구들과 우리 회사, 조직, 운동의 한해를 돌아보고, 내년도 활동을 계획하는 자리였다. 기말고사와 과제 마감과 이런저런 일들을 피해 날짜를 모으고 보니, 여덟 명이 한 번에 모일 수 있는 날은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를 앞둔 주말 저녁 뿐이었다. 친구들이 준비를 맡았다. 

회의실과 숙소를 겸할 곳을 구하기 어려워 외국인들이 주로 묵는다는 홍대 앞 게스트하우스를 빌렸다. 이층침대 세 조에 좁고 납작한 침대 두 개가 더 있는 소박한 곳이었다. 배달 앱으로 치킨과 떡볶이, 스시와 김밥을 시켰다. 오랜만에 이십 대의 마음으로 돌아간 듯 했다. 장을 봐 온 것을 풀어보니 술이 너무 적었다. 회의에 집중을 못할 것 같다며 맥주를 꼭 한 병씩만 사온 것이었다. 예산에 한계를 두지 않고 펑펑 쓰다 파산 지경에 놓인 대표를 생각해, 일부러 쫀쫀하게 들고 온 것 같기도 했다. 그 마음이 헤아려져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한 해의 자랑과 한 해의 삽질을 공유했다. 개인적인 것에서 조직의 일들로 이야기는 자꾸만 확장됐다. 광대가 찢어지도록 웃다가, 연신 코를 풀며 울었다. 옆방과 아랫방에서 자꾸만 함께 놀자는 친구들이 왔다. 술집에서 불시에 신분증 검사를 당할 때처럼 기뻤다. 대학생 친구들과 일을 하면서 덩달아 나이가 깎이는 체험을 하고 있다. 늙어간다는 증거로서 이보다 더 명백한 건 없을 게다. 내년엔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조금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득 안고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집에서는 크리스마스 이브마저 이럴 거냐는 지청구가 여러 통 와 있었다. 중학생 큰놈은 이래저래 넘어가도 유치원생 둘째놈의 크리스마스는 대충 넘기기 어려웠다. 레고 매니아인 녀석에겐 마인크래프트가 꼭 필요한 선물이었다. 아뿔싸, 하필이면 공항 옆 대형마트가 쉬는 날이었다. "만국의 워킹맘들이여, 단결하라."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다행히 제주의 마트는 영업 중이었다. 공항에 나온 아이들이 마트까지 따라온 통에 부모의 공식 선물 외에 산타의 비밀 선물은 사지 못했다. '유딩'은 엄마가 바빠 크리스마스 트리를 못 만든 탓에 산타가 못 오신 거라고 굳게 믿었다. 여느 택배가 그렇듯 제주엔 하루 늦게 오신다고 대충 둘러댔다. 

올 크리스마스에는 생략한 것들이 유독 많았다. 온 식구가 정장을 차려 입고 호텔 밥을 먹던 일도 생략. 화려한 트리 옆에서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4인 가족 한 끼에 수십만 원을 쓸 수는 없었다. 농협에서 장을 봐 고기를 구워 먹었다. 허스키 '쪼꼬'도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서, 한우 한 덩이와 흑돼지 목심 한 덩이를 나눠 먹었다. 아이들은 식탁 머리에서 올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새삼 생각해냈다. 내가 미국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강아지 백혈병으로 갑자기 떠난 사모예드 '쌔미'만이 아니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자 '일닭이'와의 권력 다툼에 스러진 잘생긴 '이닭이'도 있었다. 닭들이 활개치며 노는 것을 새장 속에서 안달하며 부러워하는 꼴을 보고, 홧김에 풀어준 잉꼬 '네즈'도 있었다. 네즈는 곶자왈 쪽으로 날아가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당일, 케이크에 얹혀 있던 '핑크퐁' 아기상어는 밤새 지치지도 않고 뚜루루뚜루 노래를 불렀다.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 되도록 아무 데도 나가지 않았다. 더러는 하던 일을 하고, 더러는 레고를 조립하며, 집에서 놀았다. 페이스북 친구들도 대개 그랬다. 가족이 아니라면 혼자, 그도 아니면 반려동물들과 함께였다. 흥청에 망청이 사라진 것 같았다. 허세도 호기도 사라진 듯 했다. 생각해보니 마흔 살의 크리스마스엔 아무 것도 받지 못했다. 산타 할아부지, 비트코인은 글렀으니, 착한 투자자를 주세요.

새 주인이 들어선 옆집은 아침 일찍부터 포크레인이 와서 부수고 있다. 먹고 사는 일의 지엄함은 크리스마스라고 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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