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민스토리 / 배우·문예운동가 윤미란씨

1987년 격랑기 문예운동 시작으로 20여년 무대 인생
'치열하게 연구하는 일' 자부심…문화자존감 회복 목표

 

"저승질 가면서 보니 그 때가 제일 고왔네"

지난달이었다. 제주 두 여성 연극인이 풀어낸 한 판 인생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일인냥 고개를 끄덕이고 웃고 또 웃었다. 상상놀이터가 기획한 창작극 '선물, 이제 와서'다. 히로인 중 한 명인 꾼이자 광대 윤미란씨(52)를 만났다.

윤씨는 대학 문예패 시절까지 포함해 무대밥을 먹인지 30년 가까이 된다. 그의 20대 초반은 격동기였다. 극장가에 진하면서도 아픈 감동을 전하고 있는 '1987'년을 온몸으로 겪었다. 시골에서 공부만 했던 '아이'는 암울했던 시대를 거치며 '언더'(운동권)가 됐다. 학생운동이라 부를 만큼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현실과 이상의 차이에서 몸살을 겪다 문예운동이란 것을 만났다.

윤씨는 "한참 단과대학별로 문화패가 만들어지던 때였다. 그때 '수리'라는 동아리에 들어간 것이 시작이었다"고 회상했다. 1991년 막무가내 놀이패 한라산을 찾아갔다. '하겠다'고 제발로 찾아오는 일이 없던 때다 보니 프락치 오해를 받고 문전박대를 당했던 사정도 나중에야 알았다. 입단한 첫 해 '헛묘' 공연에 참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놀이패 한라산 공연의 한 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만큼 말 못할 사연도,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부터 나는 일도 많았다. 4·3을 무대에 올리다 보니 시작부터 '블랙리스트'였던 놀이패 한라산의 사정을 알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

한번도 '연기는 내 운명'을 외쳐본 적 없던 까닭에 무조건 열심히 했다. 윤씨는 "선배들이 무슨 말을 하면 꼭 그래야 되는 줄 알고 열심히 매달렸다"며 "무리하는 대신 치열하게 연구하는 것을 그 때 배웠다"고 말했다.

그의 무대는 그래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다. 늘 자신의 얘기거나 주변 아는 이의 일처럼 느껴져 눈을 떼기가 어렵다. 이번 작품에 앞서 혼자 무대를 꾸렸던 모노드라마 '이녁'도 그랬다.
윤씨는 "제주에서 배워서 그런지 나는 배우는 광대이자 심방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 수도 있지만 그 것을 통해 내 얘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놀이패 한라산에서 '굿'을 만나면서 시작된 오랜 가슴앓이기도 하다. "굿이라는 것이 풀어내는 신명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 진정성이나 순간 뿜어내는 에너지는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날 정도였다. 나도 그 일부가 되고 싶었다"는 말은 스스로 짊어진 평생의 숙제라는 고백이다.

윤씨는 올해도 무대에 선다. 그리고 문예운동가로의 꿈도 키워갈 예정이다. "당굿에 깔려있는 마을공동체 코드를 살리고 싶다. 4·3이나 각종 개발사업으로 상처받은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문화자존감을 찾아주고, 다시 살게 하는 것이 목표"라는 말에 힘이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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