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주 제주에코푸드 대표·논설위원

국립제주박물관의 기획특별전 ‘삼별초와 동아시아’가 마무리 하루를 앞두고 있다. 역사상 제주가 가장 급변하는 세계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 간 시대는 13세기 말이다. 당시의 제주 모습은 현재의 눈으로, 현재의 제주 모습은 과거의 눈으로 비춰 볼 수 있었다.

삼별초군이 제주에 지휘본부를 차린 곳은 항파두리다. 본래 조선정부가 명명한 공식명칭은 ‘항파두고성’이다. 16세기 국가기록물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렇게 쓰여 있다. 우리가 이곳을 항몽유적지로 부르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1976년 제주도기념물 ‘항파두리항몽유적지’로 지정되면서 부터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그 명칭의 배경에는 정치적으로 다분한 의도가 개입됐다. 1970년대 후반 유신정부는 호국 이데올로기의 기치를 걸고 대대적으로 관련 유적을 찾아 정비작업을 벌였다. 강화 진도 제주에 남아 있는 삼별초 유적이 그 가운데 하나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항파두리 정비사업에 무척 공을 들인 터라 준공까지 세 차례나 현장을 찾았다. 박 대통령은 준공하는 날(1978년 6월 9일) 항몽순의비 제막식에 참석하여 "참배객들이 몽고 침략을 물리친 그분들을 추모할 수 있도록 분향대 설치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대한뉴스 제1188호). 그 후 한 동안 정부 인사들이 제주도를 방문할 때나 학생들이 수학여행 시 꼭 거쳐 가는 이른바 ‘호국의 성지’로 성역화 시켰다.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민의 정부 시절 고 김용순 노동당 비서도 김정일의 특사로 남한에 왔다가 항파두리를 찾았다. 그는 방명록에 ‘몽골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삼별초군의 애국투쟁정신은 후세에 길이 전해지리라’고 투쟁을 기리는 글을 남겼다.

그러면 현재 우리 제주도민들은 항파두리성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을까. 삼별초에 대한 우상화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일까. 어른도 그렇고 학생들도 그렇고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 증거가 국립제주박물관 삼별초 전시실에 마련된 관람후기 게시판에 게재된 소감문이다. 삼별초에 대해 올린 단문들이 대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짙게 나타났다.

삼별초에 대한 편향적 경향은 항파두리성을 방문했을 때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항파두리 내성을 따라 현수막들이 나란히 걸렸는데, 마치 삼별초 광고를 보는 듯 했다. 제주특별자치도 교육청의 후원으로 ‘삼별초 항쟁길 탐방 및 학생시화 공모전’(2017년 11월 12일)을 개최하고, 삼별초를 찬양하는 각가지 내용들을 사진과 시의 형식으로 제작하여 게시했다. 항파두리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가르치지 못한 대물림이다.

국내 일부 학자들은 강화 진도 제주로 이어진 삼별초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신청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별초 유적의 가치를 지금처럼 도전과 응전의 민족사(항몽사)적 관점으로 제한한다면, 신청 결격사유에 해당 된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는 유네스코 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제주 항파두리유적은 강화나 진도 삼별초 유적의 가치와 다르다. 항파두리 유적에서 삼별초 이후에 개축되어 한동안 재이용됐던 건물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더불어 삼별초 이후로 추정되는 연대인 신축년(‘辛丑年’) 또는 원(‘元’)이 새겨진 명문기와가 수십 점이 출토되었다. 대부분 고내촌과 곽지촌에서 제작된 토종 기와들이다. 그뿐 아니라 강화와 진도에서 볼 수 없는 양질의 중국산 고급 도자기들과 동전들이 다량 출토되고 있다. 원대 탐라총관부 시기 항파두리가 해참(역참) 즉, 해상 교역센터로 활용됐을 가능성도 추정할 수 있는 중요 물증들이다. 향후 발굴조사가 확대된다면 고고학적 증거는 더욱 축적되어 그 성격이 명약관화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동안 항파두리는 김통정의 항몽유적지로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세계사 속의 항파두리 진면목을 볼 수 없도록 마비당했다. 이제 제주는 민족주의이라는 경계를 허물고 문화다양성을 재창조하는 특별자치도로 나아가야 한다. 항파두리성이 항쟁의 성을 넘어 해양교류의 성지로 거듭나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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