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연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장

2017년 2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던 26일. 나는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 한인 교회에 있었다. 그날은 3·1절 98주년 기념예배여서인지, 주보와 함께 독립선언문을 받았다. 독립선언문을 교회에서 받아볼 줄은 상상도 못 했을 뿐더러, 고등학교 국어 시간 이후 그 전문을 보는 게 처음이라 그저 신기했다.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3·1절 기념예배의 식순으로서, 애국가 제창과 '독립선언문 및 공약삼장 낭독'이 이어졌다. 청년·학생대표가 각각 읽어가는 독립선언문과 공약삼장을 들을 때, 나는 마치 98년 전의 한국으로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의 함성이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가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던 당시의 학생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낭독 후의 만세삼창은 또 어떠했나. 나는 2014년부터 3년간 3·1절 중앙기념식에 참석하였는데, 그 기간 중 어떤 만세삼창도 그날 이국의 한 예배당에서 외쳤던 만세만큼 마음을 흔들지는 못했다. 서울의 웅장한 공간, 잘 정돈된 단상과 플래카드, 정장을 갖춰 입은 기념식 참석자들 틈에서 불렀던 만세는 1시간여의 '행사'에 내가 참석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작년 미국의 교회에서 사람들과 함께 했던 3·1절 기념예배는 3·1절 자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해주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당시 일본의 폭정으로 생존마저 위협받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그 내용이 지극히 온건하고 이상적이며, 국제정치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현실인식이 곳곳에 드러나 있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곤 한다. '인류의 공통된 본성과 이 시대를 지배하는 양심이 정의와 인도를 실현하기 위해 군대와 무기를 대신하여 도우고 지켜주는 오늘날'이라든지, '일본의 신의 없음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언서에는 민족의 양심을 회복하고 개인의 인격을 발전시키며 후손에게 쓰라리고 부끄러운 재산을 물려주지 않기 위하여 독립이 필요하다는 인식과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내가 뉴욕에 머물던 1년 동안 다닌 교회는, 1921년 3·1운동 기념식 이후 설립되었다. 교회 창립이 3·1운동 정신의 계승 발전을 통한 조국 독립 쟁취, 한인들의 단결과 보호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복 이전까지 교회의 역사는 교회에 몸담았던 사람들, 교회를 오고갔던 한인들이 어떻게 조국 독립을 위해 노력했는가를 보여준다. 한인들은 꾸준히 독립운동 성금을 내었고, 유학생들은 언론활동을 통해 한국 동포들, 미국 내 유학생들 간 유대관계를 지속했다. 한국 독립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미국 유력 인사들에게 역설하려는 노력도 계속되었다. 

3·1운동은 한국 독립에 대한 미국인들의 공감을 얻는 결정적 계기였다. 3·1운동과 일제의 폭력 진압 소식이 전해지면서 민족적, 인간적 차원에서 한국 독립의 필요성과 당위성이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우호적인 외국인들의 모임인 한국친우회의 결성일이 1919년 5월 16일인 것도 그 영향을 보여준다.   

혹자는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은 성금 모금과 외교적 노력에 그쳐, 중국이나 일본에서의 목숨을 건 무장투쟁에 비교될 수 없다고 한다. 일견 타당하나, 미국의 한인들도 생활고와 인종 차별을 감내해가며 조국 독립을 위해 '싸웠다'는 것을 지난 1년 간 미국에서의 독립운동과 한인사회의 역할에 대해 연구하며 새삼 깨달았다. 3·1운동의 세계사적 의미와 중요성도 이전보다 절실하게 느꼈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99년이 되었다. 아직도 일본정부의 부인 속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역사적 문제와 받지 못한 사과가 남아 있다. 독립운동가의 가족을 보살피고,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역사적 책임도 있다. 이는 국가가 앞서 수행할 과제이다. 그러나 3·1절 하루만이라도 그 날의 간절함과 절실함을 우리 모두 함께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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