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식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제주지사장

또 다시 새 생명의 싹이 돋아나고 온갖 생명의 탄생으로 왠지 모든 일들이 희망으로 넘쳐흐를 것 같은 충만의 계절이다. 사월! 새로움, 그리고 희망, 왠지 모를 설렘으로 단지 막연함이 아니라 모든 꿈과 희망이 실현되리라는 기대감이 넘쳐흐르는 계절이다. 무릇 사월을 여왕의 계절이라고 하는 것도 생명의 敬畏(경외)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모든 생명들이 한결같이 다른 모습으로 각자의 차이를 뽐내며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르는 계절, 모든 것들이 다양성으로 충만하기에 차별과 편견이 드리어질 여지가 없다.

그래서 사월을 포용과 다양성의 계절이라 부르고 싶다. "만물은 다양하기에 아름답다."라는 말이 새삼 가슴깊이 느껴져 온다.

특히, 사월은 인간존중과 평등으로 차별과 편견을 없는 세상을 알리는 달이다. 바로 장애인의 날이 있고 또 장애인고용촉진 강조의 달도 있다.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지정하고, 장애인 고용촉진강조의 달로 지정했지만 장애인만을 위한 달은 결코 아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관심을 같고 함께 어울리는 통합의 달이다. 우리가 장애인에 대하여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고 인식을 개선하고자 그 얼마나 노력했던가. 사람은 나와 다른 모습과 차이에서 자기 존재를 인식한다. 모두가 같다면, 모두가 차이가 없다면, 모두가 능력이 같다면 과연 인류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 만약 이런 차이와 다름이 없다면 아마도 인간존재에 대한 인식은 존재하지도, 인류의 문화도 발전하지 못하고 멸망했을 것이다. 밤하늘의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별들도 모두가 다름으로 우주와 조화를 이루고, 우리가 사는 이 지구도 다름과 차이로 인해 조화의 균형으로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와 인류의 발전은 바로 다양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양성이 없다면 인류의 진보는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장애인 역시 이 세상 아니 이 우주에서 유일한 생명으로 아름다운 존재다.

장애라는 것은 개인의 문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 사회구조에서 발생하기에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그래서 장애인에 대한 우리 모두의 책임과 의무는 당연한 것이다.

진정으로 다양성을 포용하는 사회는 상대적인 약자를 포함한 모든 이들의 행복을 함께 충족해주어야 할뿐 아니라, 그들 각각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해줘야 한다. 포용적 평등의 지상명제는 다양성에 바탕을 둬야지 그것을 결코 방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반세기만에 세계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이 발전을 거듭해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달성하는 등 최빈국에서 선진국 못지않은 세계의 중심국가가 됐다.  하지만 미국의 어느 학자가 안타까워한 것처럼, 우리나라 국민들은 우리가 선진국임을 아직도 인지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이는 아직도 한국사회의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 포용적 민주시민으로의 의식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에서 시민들이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반대 시위를 하고 장애인당사자 부모는 반대 시민에게 간절한 호소의 눈물을 흘리면서 무릎을 꿇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장애인 편견과 차별이 유독 후진적 국가를 면치 못하고 있는 극단적 님비(NIMBY)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참으로 비참한 현실이다.

선진적 포용적 사회로의 이행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인간의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 평등 추구이어야한다. 결코 획일적 평등이 돼서는 안 된다. 우리사회는 '특수'라는 단어에 무조건적인 선입견으로 군중심리에 움직이는 확증편향 집단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제임스 밀의 말처럼 우리 사회 모두가 자신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무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평등은 인간 생명 존중에 있어 다양성 평등을 지향해야지 획일적 평등을 요구해서는 결코 이 사회는 진보할 수가 없다. 

마치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처럼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억지로 자신에게 맞추려는 하는 사회는 결코 희망이 없다. 

사월! 장애인의 날! 그리고 장애인 고용촉진강조의 달!

수백 년 전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어떤 사람이 장애인을 놀리면  그 장애인을 놀리는 사람이 가장 천박한 자라고 간주한다"고 했다. 어쩌면 이상향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세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 곁, 우리 주변 그리고 우리 이웃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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