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문철 전 제주도교육청 교육정책국장·논설위원

그러니까 그게 딱히 언제부터라고 말하긴 좀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제주는 시나브로 '제주다움'을 잃어간다는 느낌이 확연하다. 이러한 정체성의 상실감은 자연풍광, 주민정서, 산업특성, 법과 제도 등 우리 생활 전반에 걸쳐,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 점점 안으로 스며든다. 이러한 상념들을 아픔으로 공유하는 제주의 예술가들은 저마다의 장르를 따라 문학으로, 그림으로, 그리고 사진 등으로 다양하게 몸부림쳐댄다. 

여기엔 기후마저 한몫 거든다. '황사'는 이젠 우리와 이골이 난 지 오래 됐고, 요 근래 들어서는 듣도 보도 못 하던 '미세먼지'란 게 하루건너 우릴 괴롭힌다. 그 폐해가 황사 보다 훨씬 더하다니 걱정이다. 게다가 근년 들어 비는 또 왜 그렇게 잦은지, 그저 툭하면 비 날씨다. 불과 한 이태 전까지만 해도 제주의 높푸른 하늘은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더불어 우리의 큰 자랑이 되어온 터다. 얼핏 생각하기에 기후야 인간이 어쩌랴 싶지만, 실은 이런 것도 다 우리네 삶과 결코 무관치 않으니 이 또한 문제다.

산야로 나가면 허접한 축사에서 나는 악취가 코를 찌르고, 바다로 나가면 양식장의 칙칙한 지붕이 주는 이미지와 그로 인한 오폐수가 해변정취를 해치는가 하면, 딱딱한 콘크리트의 희멀건 제방이 갯가로 내닫고 싶은 동심을 막아선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래톱이 점점 쓸려나가고 녹조와 갯녹음이 짙어지는 데에 그 둑이 되레 일조한다나. 어디 그뿐이랴. 해변의 정취를 맛보며 소소하게 미역, 파래, 보말, 게 등이나 한 웅큼 얻어 볼라치면, 세상에 이게 안 되는 일이라니. 아니 내 고장, 우리 동네 갯가에서 갯것을 한 두 줌 캐어보는 재미마저도 어촌계장 허락 없이는 어불성설이라니, 이거야 나 원 참, 어느 게 진짜 어불성설인지 모르겠네. 이게 단지 그 동네만의 횡포인가 했더니 웬걸 관계법령까지도 있다나. 이러저런 일의 취지를 내심 모를 바는 아니나, 그래도 이들은 발전의 역효과가 아닐 수 없다. 생각해 보시라. 이런 게 정녕 '나의 살던 고향'인가를. 

제주는 지금 곳곳이 펜션이니 타운하우스니 하는 건축공사로 날을 샌다. 그것도 공장 제품처럼 하나같이 찍어낸 듯한 모양이라니. 그 많은 주택에 살 사람은 누군지, 수요는 제대로 따져보기나 한 건지. 어디 그뿐이랴. 도심으로 들어오면 웬 차량들이 그리도 많은지. 이젠 러시아워란 게 따로 없다. 수시로 명절날 귀성전쟁을 방불케 한다. 서울사람이 되레 고개를 젓는다니 이 또한 아이러니다. 그리고 아무리 관광지기로서니 렌터카는 어찌 이리도 많은지. 가히 제살 파먹기 식 경쟁을 벌인단다. 이게 과연 제주다움이며 성장이란 말인가. 도대체 이러한 일련의 트렌드를 움직이는 당국은 지금 휴가 중인가.

물론 제주의 성장과 번영은 관광을 비롯한 산업의 발전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가시적인 성장에만 매몰되다보니 전래 고유의 '제주다움'의 상실은 이제 도를 넘는 수준에 이르렀다. 말이 쉽지, 실은 이도저도 딱한 노릇이긴 하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얻는 것은 '돈'일지 모르나 잃는 것은 '얼''이라는 명제의 '야속한 두 얼굴' 로 인해, 우린 지금 한창 성장통(成長痛)을 앓고 있다. 잘 살아보려는 꿈의 뒤안길에서 소리 없이 허물어져가는 자화상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성장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오늘의 추이가 개념과 방향성을 의심케 한다. 끝내 모르쇠로 제주발전의 방향키를 이렇게 방치해둔다면, 앞으로 온전히 자리보전해 있을 것이 과연 어떤 게 얼마나 될지가 적이 궁금하다 못해 우려스럽다. 성서는 가르친다―'영혼 없는 육체는 곧 죽은 것'이라고. 그렇다. 오늘의 성장과 발전, 과연 무엇을 지향하고 또 누구를 위함인가. 개념이란 바로 이런 물음에 정론으로 응답함이다. 결국 '개념' 없는 인간에겐 '영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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