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실 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 회장·문학평론가·수필가·논설위원

한 나라 언어는 그 민족·종족의 세계관과 역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고대 마야국은 '나'보다 '우리'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했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우리 부모님, 우리 형제, 우리 고향, 우리 집 등과 같은 언어 표현들이다. 지금도 가족과 공동체를 존중하는 관습이 현대 인디오들 의식구조에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개인주의 사회는 주체인 나와 객체인 너가 존재하는 반면 공동체 사회에서는 나와 너 모두가 하나의 주체가 된다. 스페인어 문장의 경우 "나는 너희에게 말했다" 하나의 주어, 하나의 간접목적어, 하나의 동사로 구분된다. 이때 나는 그 상황을 지배하고 있고 '너희'는 종속·수동적 대상으로서 둘의 관계는 수직적이며 명령과 복종 관계에 있게 된다. 반면, 같은 의미의 마야어(語)는 "나는 말했고 너희는 들었다"로 표현한다. 여기에는 두 개의 주어와 두 개의 동사가 있다. 이것은 나와 너희는 쌍방향 대화하는 수평·상호보완 관계에 있으며 모두 동등한 주체가 된다는 의미다.

21세기, 제4차 산업시대에 진입한 우리는 카오스적 얼굴들로 번득인다. 이 얼굴들은 우리의 미풍양속인 전통문화, 가족과 공동체인 덕목인 도덕과 가치관. 예의 등을 급격히 무너뜨리고 있다. 여기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절대적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의 가장 대표적인 기능은 개인 신상 정보의 등록 및 공개인데 원하든 원치 않든 정보가 선택적으로 공개된다. 칭찬과 격려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상대를 향한 비방에는 위아래가 없다. 필요하다 싶으면 포털사이트에다 가짜뉴스를 제공하며 댓글에 첨단화된 프로그램에다 닉네임으로 여론을 대량조작한다. 바로 사이버 공간의 언어폭력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인 빌 게이츠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인터넷은 세계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맞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장밋빛 예언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도리어 언어폭력·언어전쟁과 같은 새로운 전쟁들로 우리 모두를 절망과 회의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 언어폭력은 본래의 목적과 궤도를 벗어난 통제와 억압으로 유지하는 권력이다. 이 권력은 독재 개념세계뿐만 아니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부정하는 야만적인 질서다. 

요즘의 정치뉴스를 보면 조선 14대 선조 때 이조전랑 문제로 조선 붕당의 서인과 동인도 이랬으리라 싶다. 나는 그동안 정당에 가입한 적도 없고 관심도 없다. 하지만 제17기 민주평통LA자문위원(2015~2017년) 고문으로, 남북문화예술 교류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고, 강연도 했다. 그런데 국정농단으로 촉발된 촛불집회에 발 빠른 일부 평통자문위원 간부들은 시류에 편승하는 것을 보며, 제18기 민주평통LA자문위원직은 스스로 포기했다. 이유는 이념이 아니라 정치적 포퓰리즘에 따라 쉽게 이름표를 바꾸어 어제의 동지를 배격하며이익의 기득권으로 변모(?)하려는, 나의 비겁해짐과 기회주의가 발동할까 싶어 그랬다. 

그렇다. 너와 나의 생각과 환경이 바뀌면 그동안의 이념적 가치관과 분별력을 쉽게 바꾸고 비판한다. 이 비판은 그동안 우리 몸에 축적된 이기적 형성 확립의 중독현상에 기인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의식중 그때그때의 감정에 따라 쉽게 말하고 쉽게 남을 비판하며 화낸다. 이런 것들이 모여 점점 더 어려운 세상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우리는 언어폭력으로 자신이 인식하지 못한 채 저지른 폭력, 남을 배제한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모두 공범의식을 가져야 한다. 내가 옳다고 화내고 흥분했던 그 생각도 며칠만 지나면 내 이기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언어폭력은 공동체 언어인 '우리'가 될 때 시비는 비로소 사라질 것이다. 일방적 표현이나 진실을 감춘 대화는 메아리치다 골짜기로 이내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휘파람 소리와 같은 것이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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