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영 제주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소장·논설위원

투표는 내 권한 위임장에 도장 찍기
서류처럼 공약 살펴 한 표 행사해야

증자(曾子·기원전 506~436)는 효와 신(信)을 덕행의 근본으로 삼은 중국 춘추시대의 큰 유학자다. 하루는 그의 부인이 장에 가려고 나서자 어린 아들이 따라가겠다고 울며 떼를 썼다. 엄마는 달랠 요량으로 "시장에 다녀온 뒤 돼지를 잡아 맛있는 반찬을 해줄 테니 집에서 놀아라"고 말했다. 아들은 고기 먹을 생각에 울음을 그쳤다. 증자는 옆에서 묵묵히 아내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얼마 후 아내가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이 마당에서 돼지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당시 돼지는 집안의 큰 재산이었다. 놀란 아내는 "왜 돼지를 잡느냐"고 다그쳤다. 증자는 "당신이 아이에게 약속했지 않느냐"고 말했다. 아내는 펄쩍 뛰며 "아이를 달래려고 그냥 해본 소리"라며 말렸다. 그러자 증자는 "아이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오. 아이는 부모를 따라하는데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아이가 뭘 배우겠소"라며 기어코 돼지를 잡았다고 한다.

얼마 전 어린이날 조카가 "고모~ 올해 어린이날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 다같이 가족여행 간다고 했죠?"라고 물어왔다. 순간 당황한 나는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작년 이맘때쯤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다. 

그것을 기억하고 있던 조카가 약속이행을 요구해온 것이다. 가족여행 약속은 지키지 못하고 운동화 선물과 저녁식사로 대신했다. 결국 손가락 도장으로 올해가 가기 전에 여행약속을 지킬 것을 다짐했고, 부끄러움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고모가 된 어린이날이었다. 

바야흐로 약속의 시간이다. 6·13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선거에 출마하는 도지사 예비후보와 도의원 예비후보들의 공약들이 줄을 잇고 있다. 도민들을 향한 약속이다. "과연 저 약속이 지켜질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들도 적지 않다.

공약(公約)은 정부나 정당·입후보자 등이 사회 공중(公衆)에게 '어떤 일의 실행'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빌 공(空)' 자의 공약(空約)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왜 그럴까? 물론 일차적 책임은 실현 가능성 여부를 당장의 표를 의식해 공약(空約)을 남발하는 후보자들에게 있다. 허나 더 큰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약속을 잘 살펴보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 유권자들에게 있다고 본다.

약속은 '장래의 일을 상대방과 미리 정하여 어기지 않을 것을 다짐함. 또는 그런 내용'이다. 그런즉 유권자들이 예비후보자들의 공약(公約)을 기억해 지킬 것을 요구할 권한과 책임이 있다.
단지 표를 얻기 위해 마구잡이로 던지고 보는 선심성 공약은 선별해야 한다. 진정성 있고 실현 가능성 있는 공약을 가려낼 수 있는 분별력과 판단력이 필요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괜당'을 뽑는 시대는 지났다. 우리 지역에 필요한 일꾼을 공약의 진정성 등 정책으로 선택해야 한다. 

도지사 예비후보들은 유권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위해 각 공약의 목표와 우선순위·이행절차·이행기한·재원조달방안 등을 적시한 공약집을 내놓아야 한다. 도의원 예비후보들도 실현가능한 공약을 제시하고 그것을 지역주민들에게 성실히 알려 '검증' 받아야 한다.

제주도를 이끌어갈 리더를 뽑는 이번 선거에서 정책이 아닌 비방과 고발·폭력으로 얼룩지는 사태가 아쉽다. 31일부터 본선거운동이 시작된다. 이제 우리는 정책과 공약, 도덕성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도지사와 교육감, 도의원 선출은 우리를 위해 대신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인 만큼 투표는 내 권한을 타인에게 위임하는 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 내용을 살펴보지 않고 위임장에 도장을 찍을 수는 없는 것처럼 후보자들이 말하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살펴보고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

투표가 끝이 아니라 '서로 미리 정하여 어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약속의 시작이 되기 위해 후보자와 유권자 모두의 역할이 중요하다. 적어도 큰 재산인 돼지를 잡는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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