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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최후의 격전지이자 대몽항쟁의 종착지 제주도5.삼별초의 마지막 항몽거점지 '항파두리'
김지석 기자
입력 2018-08-05 (일) 16:28:52 | 승인 2018-08-05 (일) 16:36:05 | 최종수정 2018-08-05 (일) 16:36:05
제주도는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에 맞서 싸운 최후의 격전지이자 대몽항쟁의 종착지다. 사진은 삼별초 최후 항전지인 항파두리성 내성지.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강화도를 떠난 삼별초는 진도를 근거지로 택했다. 강화도를 떠나온 삼별초는 진도에서 활동을 개시했다. 삼별초의 활약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와 패전 그리고 퇴각으로 이어지면서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었다. 1271년 5월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받으며 진도는 함락되고 배중손 장군도 전사했다. 삼별초는 다시 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항파두리에 진지를 구축한 뒤 항전을 이어갔다. 제주도는 고려 원종 14년(1273년) 삼별초가 1만2000여명의 여몽연합군에 맞섰던 최후의 격전지이자 대몽항쟁의 종착지이다. 제주 삼별초는 고려의 마지막 항몽세력이며, 항파두성은 고려의 마지막 항몽거점지였다. 

△김통정 장군 천혜 전략지 항파두리성 구축
김통정 장군은 삼별초의 잔여 병력을 이끌고 제주로 이동했다. 이때 남해 등지에서 활약하던 유존혁 장군도 군선 80척을 거느리고 합류했다. 이들은 김통정 장군을 중심으로 진용을 정비하고 최후의 결전을 제주도에서 치렀다.

제주도에 상륙한 삼별초는 진도 세력 외에 경상도, 전라도 여러 도서와 내륙에서 집단으로 입도했다. 

제주도로 들어온 김통정은 항파두리에 성을 쌓고 여몽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항파두리성의 내성은 돌로 쌓은 석성(石城)으로 둘레가 700m정도다. 외성은 언덕과 계곡의 지형을 이용해 토성으로 쌓았으며 동서남북 4대문이 있었다. 항파두리는 적선의 움직임을 한눈에 살필 수 있고, 서쪽으로는 명월포, 동쪽으로는 조천포, 함덕포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천혜적인 전략지다.

이와 함께 애월목성과 해안 300여리에 걸친 환해장성도 이때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관군이 완성하지 못한 것을 삼별초군이 마무리해 여몽연합군 공격을 저지했던 돌담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 삼별초 대몽항쟁 활발
제주도에 들어온 삼별초는 현지 제주도민들과의 관계를 고려, 제주에서 전통적인 권위를 유지해 오던 성주(城主), 왕자 등의 인물들을 조정해 대내외 관계에 이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도에서 기력을 회복한 삼별초는 다시 고려 해안지역을 공격해 식량과 물자를 확보했다. 삼별초는 전라도 연안해역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면서 원종 13년(1272) 하반기 이후 전라도 일대는 다시 삼별초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삼별초는 서해안까지 올라와 개경에 위협을 가했다.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특히 일본정벌을 위해 전선을 만들고 있는 경상도지역까지 쳐들어가 전선을 불태우기도 했다. 일본정벌용 전선이 삼별초 진압에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몽골은 일본을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일본 정벌에 반드시 필요한 고려의 수군이 삼별초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어 제주 삼별초군의 진압이 무엇보다 시급한 사안이었다.

△여몽연합군 맞서 제주 삼별초 최후 일전 
이에 몽골은 여몽연합군을 중(中·)좌(左)·우(右) 삼군으로 재편성해 1273년 4월 28일, 전선 160척과 군사 1만2000명을 동원해 제주도 삼별초 섬멸에 나섰다.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본격적인 대몽항쟁을 한지 2년만이었다.

여몽연합군은 중군을 중심으로 좌우 양익(兩翼)으로 분산 배치해 작전을 개시했다.

상륙작전을 지휘한 김방경 장군은 주력부대가 명월포로 상륙하는 것처럼 가장하면서 실제는 주공을 함덕포로 돌리는 양동작전을 펼쳤다.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을 맞아 처절하게 싸웠다. 

여몽연합군이 상륙해 오자 함덕포에 대기하던 삼별초군은 비록 주력부대는 아니었지만 완강히 저항했다.

함덕포 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비양도에서 대기하던 좌군은 항파두성 북쪽에 있는 군항포를 기습상륙해 삼별초군을 협공, 파군봉에 포진해 있던 삼별초군과 격전을 벌였다. 

이 파군봉 전투는 삼별초군의 공방전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서, 승부를 가리기 힘든 혈전이 전개됐다. 하지만 함덕포에 상륙한 김방경 장군 부대가 이 전투에 합류하자 삼별초군은 더 이상 여몽연합군을 저지할 수 없었다.

삼별초군은 일단 항파두성 안으로 철수했지만 이미 전투능력을 상실했다. 반면 압도적인 병력과 새로운 장비를 갖춘 여몽연합군은 틈을 주지 않고 항파두성을 포위하고 삼별초군이 재정비하기 전에 공격을 이어갔다.

항파두리성이 함락 당하자 삼별초를 이끌던 김통정 장군과 휘하 군사들은 한라산 자락의 붉은오름까지 퇴각했지만 여몽연합군의 추격을 피할 수 없었다. 김통정 장군은 이곳에서 추격해 오는 여몽연합군을 맞아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삼별초는 끝까지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모두 전사했고 홀로 남게 된 김통정 장군은 산중으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려의 최후 항전 중심 삼별초
제주도 삼별초가 섬멸되면서 고려의 대몽항쟁은 사실상 끝이 났다. 강화도에서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가며 4년 동안 몽골에 항쟁했던 삼별초의 최후는 비참하게 마무리됐다.

삼별초가 섬멸되자 몽골은 고려를 속국으로 삼아 100년을 지배했다.

삼별초는 거대한 제국 몽골을 맞아 고려인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의로운 투쟁이었다. 몽골을 상대로 해 그렇게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고, 또 임시왕조를 세워가면서까지 투쟁했던 민족은 고려인들이 유일하다. 

몽골에 끝까지 맞서 고려의 자주독립을 지켜내고자 했던 고려의 최후 항전, 그 중심에는 삼별초가 있다. 

특히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여몽연합군과의 전투에서 모두 섬멸된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지만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일부 세력과 전라도와 경상도에 활동하고 있던 또 다른 삼별초는 대몽항쟁을 포기하지 않고 일본 등으로 찾아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지석 기자  kjs@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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