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작업실에 있던 판화 프레스기가 내쳐졌다. 프레스기를 쓰겠다는 이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인근 주민이 판화작업과는 상관없는 용도라도 쓰겠다며 가지고 갔다. 판화를 찍는 이에게는 소중한 물건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이동하기도 고약하고 공간은 많이 차지하는 그냥 고철덩어리일 뿐이었다. 

판화 작업을 거의 못하는 상황에서 작업실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게 빠져나가니 아쉬움보다는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함이 컸다. 

그렇다고 작업공간이 넓어진 것은 아니었다. 프레스기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판화 작업실에 쌓여있던 작품들로 다시 채워졌기 때문이다. 판화 작품들은 프레스기의 크기를 벗어나지 않으므로 전지 이하의 크기로 제작된다. 게다가 종이에 찍힌 작품들은 도면함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액자를 하기 때문에 작품들이 공간을 차지한다는 걸 실감하지 못했다. 반면에 회화 작업은 크기에 구애받지 않으니 햇수가 지남에 따라 작업실 공간은 점점 작품들로 잠식되어 갔다. 회화 작업을 시작한 지 10년 남짓에 100여 점을 넘긴 작품을 가지고도 이러니 평생 작업을 해온 원로작가들의 작품은 어떨까? 

91세에 세상을 떠난 피카소는 회화작품뿐만 아니라 드로잉, 판화, 도자기, 조각 작품 등 5만 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유족들은 상속세분의 작품을 프랑스 정부에 유증 하였고, 정부 소유의 작품은 공공미술관 곳곳에서 전시되며 현지인들 외에도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피카소가 20세기 최고의 작가인 것은 그의 작품 하나하나의 질의 문제가 아니라 끊임없는 탐구정신과 그칠 줄 모르는 작업태도에 있다. 그가 남긴 방대한 양의 작품들은 다양한 종류의 전시로 재탄생되어 이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피카소의 경우 생전에 작품값이 높아서 작품을 많이 팔지 않고도 자유로운 작품 활동이 가능했기에 많은 양의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피카소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반적인 경우 작가가 작품전을 하고 나면 소장자를 찾지 못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오롯이 작가 소장이 되어 작업실에 쌓이게 된다. 한 원로작가의 경우 회고전을 준비하면서 작업실에 있던 천여 점 넘는 작품 중에서 전시할 작품을 추려내느라 애먹었다고 한다.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의 경우 1년에 20여 점 정도의 작품이 남겨진다고 해도 50년이면 1000점이 되는 것이다. 쌓여가는 작품을 작가들은 어떻게 관리하고 유지할까? 여유가 있다면 개별 수장고를 만들어 보관하기도 하고, 작업공간이 넉넉하다면 한쪽으로 쟁여두기도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는 어떨까? 한 후배는 이사 갈 집에 작품을 둘 만한 장소가 없어서 여건에 맞는 작품만 추리고 나머지는 작품의 싸인 부분만 도려낸 후 어쩔 수 없이 폐기했다고 한다. 모 작가는 그동안 제작된 작품 중에서 상태가 안 좋은 작품을 날을 정해 소각했다. 작품 활동에 몰입할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지만 작품 활동을 오래 한 작가라면 쌓여가는 작품, 남겨지는 작품에 대해 생각해 볼 때가 오게 마련이다. 

세상이 번잡하고 머리가 복잡하니 정리할 수 있는 것들은 하나씩 정리하면서 단순하게 살고자 하는 미니멀 라이프가 뜬다지만, 작품 활동을 하면 할수록 결과물이 쌓이는 작가들의 삶은 이래저래 미니멀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작품이란 게 일반 상품이나 물건처럼 쉽게 정리하고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한번 전시하고 나서 작가가 소장한 작품을 활용할 방안은 없을까? 미술작품을 대여해주는 미술은행처럼 공공기관이나 미술작품을 감상하고자 하는 일반인에게 임대해 주는 것은 어떨까? 

미술작품도 생물인지라 오래 살아남는 것도 있고 수명이 짧은 것도 있다. 생명력 있는 작품을 태어나게 하는 것은 작가지만 미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태어난 작품의 수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창작하기까지도 힘든 여정이지만 창작 이후의 작품들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작가들만의 몫이 아니기를 소망해 본다.    <김연숙 화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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