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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제주가 끝이 아닌 '삼별초' 일본 류큐왕국서 부활6. 일본 오키나와현의 류큐왕국
김지석 기자
입력 2018-08-19 (일) 16:50:05 | 승인 2018-08-19 (일) 16:59:20 | 최종수정 2018-08-19 (일) 16:59:20
일본 오키나와 현 나하 시에 소재한 슈리성은 오키나와 류큐왕국의 궁전으로 류큐왕국의 왕도가 되면서 전반적인 보수와 주변 정비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 삼별초가 섬멸되면서 고려의 대몽항쟁은 사실상 끝이 났다. 강화도에서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가며 4년 동안 몽골에 항쟁했던 삼별초는 1273년 제주의 싸움에서 모두 섬멸된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삼별초를 진압한 몽골은 이제 거침이 없었다. 고려를 속국으로 삼아 100년을 지배했다. 그러나 실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계유년고려와장조(癸酉年高麗瓦匠造) 명문와(銘文瓦)'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된 것이다.  이에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멸망한 게 아니라 오키나와로 이동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 전라도와 경상도 등 여러 도서에서 출발한 삼별초의 또 다른 세력들은 삼별초의 섬멸을 예견해 일부는 일본과 오키나와로 뱃머리를 돌렸다는 설도 나오고 있다.

우라소에성에서 나온 연꽃무늬 수막새.

△오키나와와 고려기와 장인의 기와
1994년 오키나와 우라소에(浦添) 시의 우라소에 성과 우라소에 요도레(성의 암벽을 파서 만든 왕실의 무덤)에서 '癸酉年高麗瓦匠造(계유년고려와장조)'라고 새겨진 암키와가 발견됐다.

사다리꼴 모양에 물고기 뼈대 모양 무늬가 함께 새겨진 이 기와의 명문은 '계유년에 고려기와 장인이 만들었다'는 뜻이므로 이 기와 명문에 고려 장인임을 기록한 것으로 볼 때 고려 장인의 정치적 지위와 긍지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13, 14세기 연꽃무늬 수막새도 출토됐다. 이 수막새는 진도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13세기 수막새의 제작기법이나 형태가 동일했다. 용장산성 기와는 삼별초가 만든 것이다.  

특히 몽골군과 고려군에 맞서던 삼별초가 진도, 제주도를 거쳐 1273년 이곳으로 왔다는데, 그 해가 바로 계유년이다.

이와 함께 '연화문수막새'와 '당초문암막새'와 같은 고려청자편도 발굴돼 삼별초의 이동설을 강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출토된 기와의 '계유년' 연대 엇갈려
'계유년고려와장조'라고 새겨진 암키와의 '계유년'의 구체적인 시기가 언제인지가 중요한 문제다.

고려 장인이 언제 오키나와에 진출했는지, 삼별초의 이동설을 알려주는 징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고고학자들은 고려의 기와 장인들이 어떻게 오키나와의 류큐 열도에 넘어와 이 기와를 만들었는지, 어느 계유년인지를 결론 내리지 못했다. 

정황상 기와의 계유년에 맞출 수 있는 고려의 연대는 1153년, 1273년, 1333년, 1393년이다.
계유년의 실제 연대는 삼별초가 멸망한 1273년설과 조선왕조 건국 직후인 1393년설이 유력하다.

많은 일본 학자들은 1393년설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하지만 최근 기와와 함께 출토된 유물들에 대한 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13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조사됐다.

이는 1271년 이후 진도와 제주에서 패전한 삼별초군이 오키나와로 건너가 1273년에 고려식 기와를 만들고 건물을 지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단서다.

아사토 스스무 교수.

△ "기와의 계유년 연대는 1273년"
일본에서도 '계유년고려와장조'라고 새겨진 암키와의 '계유년'의 시기가 1273년이 유력하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일본 오키나와 나하시 역사박물관에서 만난 아사토 스스무(安里進) 오키나와현립예술대 교수는 "출토된 유물들에 대한 탄소연대 측정 결과 등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계유년고려와장조'라고 새겨진 암키와의 계유년은 삼별초가 멸망한 1273년이 가장 유력하다"고 강조했다.

아사토 스스무 교수는 "고려의 삼별초가 일본 오키나와 류큐(琉球)왕국의 건국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주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며 "13세기 후반에 중국과 일본, 한반도의 민간차원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어 "고려는 해상제국 백제, 신라의 장보고 청해진 시대를 이어 받고 있는 해양 제국으로 조선 기술과 항해술이 뛰어난 만큼 오키나와로 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출토된 기와에 사용된 흙은 오키나와 지역의 흙이다. 고려의 기와가 류큐왕국으로 온 것이 아니라 인적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아사토 스스무 교수는 "오래전부터 오키나와에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제주와 관련된 문화와 풍습들이 적지 않다"며 "특히 오키나와는 12세기까지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신석기시대 수준에 머물렀던 곳으로 13세기에 들어서야 농경이 본격화 됐는데 일본 본토 지역과 달리 밭을 갈고 이랑과 고랑을 만들어 씨를 뿌리는 농사법이 고려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또 "오키나와에서도 제주도처럼 말을 많이 키웠다"며 "말을 사육하는 기술 또한 고려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 "삼별초 한일 교류의 가교 역할"
아사토 스스무 교수는 "고려의 삼별초는 강화에서 진도, 제주에서 치열한 대몽항쟁의 기치를 올린 용감한 군인들이라고 생각한다"며 "비록 삼별초가 패전하면서 오키나와로 건너왔지만, 삼별초로 인해 한일 교류의 가교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아사토 스스무 교수는 "류큐왕국은 13세기부터 큰 성을 쌓는 등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했는데 삼별초가 오키나와 류큐왕국에 성 쌓는 기술인 축성술 등을 전파했다"며 "하지만 삼별초와 류큐왕국의 연관성에 대해 좀 더 정밀한 조사와 문헌 검토와 함께 삼별초의 영향인지, 고려와의 교류인지 확실한 구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앞으로 삼별초를 통해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맥락에서 고려와 오키나와의 교류관계를 연결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 국제 교류와 함께 한국-일본-몽골 국가가 함께 삼별초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하는 등 국제적 연대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조선·중국·일본 중계무역지 류큐왕국

'류쿠왕국'으로 불리던 오키나와는 중세까지 조선, 중국, 일본, 동남아 간의 중계무역지로서 번영을 누려 온 독립 국가였다. 1609년 일본이 류큐를 복속시켰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미군에 의한 군정 통치를 27년간 받다가 1972년에 다시 일본 땅이 됐다.

오키나와가 일본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2세기로, 당시 오키나와에서는 아지(按司)라는 이름의 호족들이 세력을 다퉜다.

14세기 중반이 되면 오키나와 섬에는 난잔(南山)·쥬잔(中山)·호쿠잔(北山) 등 3국이 성립했다(산잔시대三山時代). 이때 쥬잔에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진공무역(進貢貿易)이 시작됐다.

오키나와 일대의 가장 유력한 경제수단이 중국을 비롯한 일본·조선 등과의 중개무역이었던 만큼 진공무역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류큐왕국이 탄생한 시기는 15세기 초로, 쇼하시(尙巴志)가 쥬잔을 시작으로 호쿠잔, 난잔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통일왕조를 건립했다. 쇼하시는 쥬잔의 성이 있었던 우라소에(浦添)가 아닌 현재의 슈리성(首里城)을 증축·확장해 왕성으로 삼았다. 

슈리성이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류큐왕국의 왕도가 되면서 전반적인 보수와 주변 정비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김지석 기자  kjs@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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