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태문 오름매니저

"여보, 아침식사 하세요" "응. 알았어. 내가 알아서 챙겨 먹을 테니까 얼른 출근해" 밤새 TV를 시청한터라 아직도 꿈나라다. 퇴직하면 잠도 실컷 자고 원없이 한 번 놀아보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여행도 가고 멀리 사는 친구도 찾아가면서 즐겁게 생활하리라 마음먹었는데 1년이 지나니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틈틈이 배운 중국어 실력으로 관광안내 봉사도 하고, 가끔씩 산에도 올라갔다. 또 환경도 부전공을 했어서 내 고장 환경을 지키는 일을 하면 보람되게 내 인생 2막을 영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퇴직하고 보니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나와 함께 활동할 마음이 맞는 친구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친구가 없었다. 혼자서 며칠 활동하다가 재미가 없어서 그만두고 집에서 무료한 생활을 하다 보니 TV가 나의 가장 중요한 친구가 되고 말았다.

바로 이때 친구로부터 "야, 너 산 좋아하잖아,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사회공헌사업으로 중장년 이음일자리사업 '오름매니저'를 모집한대, 너 한 번 응모해 봐"라는 말을 듣고 고용센터에 가서 서류를 제출했고 며칠 후 인터뷰에 응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인터뷰를 거치고 기본교육을 마친 후 '왕이메 오름' 근무를 하게 됐다.

왕이메 오름은 제주시 애월읍 화전리에 위치해 있다. 산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더덕향 같은 상산나무 관목향이 일상생활에서 찌들었던 스트레스를 단번에 날려준다. '옛날 탐라국 삼신왕이 여기서 기도를 드렸다'고 해 '왕이메 오름'이라 부르기도 하고 '소가 누워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  '臥牛岳(와우악)'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오름은 멀리서 보면 야트막한 산등성이로 보이지만 사실은 해발 612m나 되는 큰 산이다.

왕이메 오름매니저는 총 4명으로 모두 수요일 오전, 금요일 종일 근무하며 출근하자마자 숲 속에 둘러 앉아 커피 한 잔씩 따라 놓고 오늘 할 일과 각자의 건강을 물어보는 것으로 하루를 연다.

등반로 입구를 지나면 울창한 삼나무 숲이 나오고 그 길을 따라 산등성이를 올라가면 나즈막한 봉우리에 우리들만의 쉴만한 조그만 공간이 있다. 거기에 네 명이 앉아 푹 파인 굼부리를 바라보며 내가 살아온 길, 네가 살아온 길을 서로 얘기 하면서 함께 공감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 자신을 자책하기도 하면서 서로 소통하다 보면 내 마음속의 근심과 걱정은 어느덧 깨끗이 사라져 버린다. 다시 때죽나무와 상산나무 관목숲을 지나면 정상에 다다르게 되는데 앞으로는 저 멀리 한라산이 보이고 뒤로는 탁 트인 드넓은 태평양이 보인다. 만약 오름매니저가 되지 않았다면 하루종일 집에서 TV만 보고 있었을텐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왕이메 오름 신선이 된 느낌이다.

봄이면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 그리고 여름이면 짙은 녹음, 가을이면 붉은 단풍과 겨울이면 새하얀 설경을 바라보는 그 느낌만으로도 내 몸과 마음을 힐링해 줄 뿐만 아니라 용돈도 벌 수 있게 해 주는 일석이조의 '중장년 일자리 사업 오름매니저'야말로 내 인생 2막을 풍부하게 열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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