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익 중앙여고 지리교사⦁논설위원

최근 제주도 소금문화유산을 조사하는 고등학생들과 함께 비교차원에서 전남 신안군 증도 태평염전을 답사했다. 이곳은 등록문화재 제360호로 지정된 곳으로 다양한 소금 체험활동과 소금을 활용한 제품들을 구입하려는 방문객들이 찾고 있다. 태평염전은 소금문화와 염전유산을 관광자원화하고 있는 대표적인 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제주지역에서 소금생산은 '남사록(1602)'을 보면 제주목사 강려(姜侶) 재임기간(1573~1574)부터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이 문헌에는 별방(別防)과 정의(旌義)사이 6개의 염전에 소금가마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염전은 '정의군지도(1872)'의 종달리 해안과 '정의지도(1863~1907')의 종달리 해안과 보한리(남원읍 태흥리) 포구에 존재했다.   

조선시대 소금생산을 했던 사람들은 '염한(鹽漢)'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관에서 제공한 가마솥을 이용해 소금을 생산할 경우 한 달에 소금 두말, 본인소유의 가마솥을 이용했을 경우 한 달에 소금 한 말을 염세(鹽稅)로 납부했다<'탐라지(1653)'>. 당시 생산된 소금은 가마솥을 가열해 생산했던 자염(煮鹽)이었다. 염한은 조선후기 '호적중초'에서도 확인된다. 

'표인영래등록(1742)'에는 육지상인 2명이 정의(旌義)에서 구입한 소금을 제주목에서 팔려고 배를 타고 가다가 표류했으며 전남 영암상인 박성휘 등이 1749년 미(쌀) 60석으로 제주산 소금 350석을 구입하고 돌아가다가 표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사료는 소금배가 표류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육지상인들도 제주에서 소금생산이 이뤄지고 있음을 인지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 육지에서 소금 1석은 쌀 2석의 가치를 지녔으나 박성휘는 흉년으로 식량에 부족한 제주사회상을 악용해 육지부보다 4배 이상의 헐값으로 제주산 소금을 구매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수산지(1910)'는 제주전역에 23개 염전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종달리 염전은 소금 생산면적과 생산량 측면에서 제주지역 최대였다. 해방 이후 종달리 염전은 1970년 2월 제15대 제주도지사 구자춘과 제12대 북제주군수 김인화의 지원을 받아 수답(水畓)으로 변모했다.

제주민요에 '종달 근방 큰 애기들은 소금장시로 나간다'는 구절이 있다. 당시 '큰 애기들'은 소금생산과 판매를 담당했다. 소금생산주체들은 '소금졸래기(일과리)' '소금바치(종달리)' '염쟁이(구엄리)'라 불렸다. 소금장시들은 '멕사리'에 소금을 담고 등짐이나 소를 이용해 운반했다. 현장에서 소금과 곡식은 1:1 또는 2:3 정도로 교환됐다.   

소금문화는 중요한 제주의 생활사 문화유산임에도 사라지고 있다. 소금문화유산을 전승하기 위해 첫째 종달리 염전터 복원을 제안한다. 현재 이곳의 소금밭 터는 사유지로 변해 카페 등이 입지해 있으나 공유지를 활용해 종달리 염전의 과거를 복원했으면 한다. 또 지난 2015년 건물만 완공된 '종달리 웰빙소금전시관'이 현재 방치되고 있어 이곳에 소금 콘텐츠를 추가해 '종달리 소금박물관'으로 개관했으면 한다. 이것은 제주올레 1코스를 찾는 탐방객들에게 인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소금문화 전수관으로 활용될 수 있다.  

둘째 '등록문화재'라는 공식적 타이틀을 얻은 증도 태평염전처럼 제주지역 염전에서도 공식적인 타이틀을 부여했으면 한다. 우선 구엄리 돌소금밭을 '향토유산'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천한다.

셋째 소금문화유산 전승교육이 필요하다. 소금문화는 어촌문화와 해양문화의 교집합으로 제주도식 천일염(구엄리 돌소금)과 자염(종달리, 일과리 등) 생산방식을 전승할 필요가 있다. 소금생산과 판매를 경험했던 주민들을 활용한 소금문화유산 전승교육이 학교나 지역사회에서 이뤄졌으면 한다. 

넷째 종달리 소금바치, 일과리 소금졸래기, 구엄리 염(엄)쟁이들의 소금생활사 조사 및 정리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소금문화유산은 소금을 생산했던 마을을 살리는 경쟁력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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