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미영 제주한라대학교 관광영어과 교수·논설위원

지난달 24일 예술공간 이아에서 제주 작가들의 문학창작교실인 예담길에서 주최한 '제주가 낳은 대번역가 김석희, 번역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강의를 들었다. 통번역이 전공인 필자는 실제로 '로마인 이야기' '모비딕' 등을 비롯한 300여 권의 영어, 불어, 일어 서적을 한국어로 재탄생시킨 김석희 번역가가 어떤 이일까 평소에 궁금했던 차에 직접 찾게 됐다. 

서울대 불문과 출신으로 수십 년의 서울 생활을 접고, 몇 년 전 고향 애월로 돌아와서 일상에서 소위 '8:8:8 규칙(8시간 자고 8시간 일하고 8시간 놀기)'을 지키며 살아간다고 한다. 번역과 문학의 두 동네를 넘나들며 번역을 평생을 지켜야할 '조강지처'로, 문학은 가끔 만나고 싶은 '애인'으로 비유한다. 마치 마을 사랑방같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제주 문인들과 제주대 통번역 대학원 학생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김석희 번역가는 "번역이 세계사 흐름에서 주요 동인이 되었다"라면서 번역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둘러봤다.  

중세 수도사들이 헬라어와 아랍어로 쓰인 그리스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마틴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 성경으로 번역하면서 기존 종교질서가 무너졌다. 이태리의 르네상스의 원동력은 번역이었다. 

근대에 들어서 한·중·일 중 일본이 가장 번역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 간 통역이 문화 간 맥락에 따라 서로 감정을 제대로 전달돼야 한다. 

최근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영역본에 오역이 많다는 지적이 있다. 종교문서 번역은 원문에 가까운 충실도가 더 중요하다고 보지만 문학 번역은 현지화, 즉 가독성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등 딱딱하기 쉬운 주제를 쉽게 이야기로 풀어 나갔다. 

강의가 마무리 되자 필자는 요즘 한국 번역학회에서 화두가 된 기계 번역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다른 이들에게 질문을 양보했다. 그 이유는 소설 번역의 경우 아직은 기계 번역을 논하기는 시기상조라는 것을 필자의 경험을 통해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스스로 학습 능력을 갖춘 '딥 러닝(Deep Learning)'에 기반을 둔 기계 번역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이제 기계 번역과 인간 번역 결과물의 품질 차이가 좁혀지고 있다. 기술, 법, 관광 등 정형화된 텍스트는 기계 번역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온 반면 소설의 경우 아직은 기계 번역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기계 번역 시대을 맞은 영어 교육 강의실은 인간과 기술의 역동적 접점을 체험하는 공간이 되고 있다. 필자가 강의하는 영어 수업에도 그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이제 영어 교육도 가르치는 교육에서 기계와 인간이 협업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할 필요성을 실감한다. 

이제 번역학계에서도 인간 번역(HT) 대 기계번역(MT)의 대결구도로 바라보는 시각 대신에 이 둘이 서로 만나는 접점(Interface)에 주목하고 있다. 이제 번역시장은 우선 기계번역으로 돌려보고 그 결과물을 토대로 포스트에디팅(Post-Editing)할 수 있는 번역가를 찾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그 결과 소위 초벌 구이는 기계가 하고 인간은 기계가 못하는 부분을 하게 됐다. 따라서 번역 교육의 방향도 기계가 못하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번역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기에 수많은 책을 번역하면서도 아직도 소설을 다시 쓰고 싶은 유혹을 받고 있으며 번역과  창작의 두 세계를 넘나들며 인간 번역의 진수를 보여주는 김석희 같은 번역가가 앞으로 많이 나와야 한다. 앞으로 김석희 번역가가 쓸 문학작품을 기대해 보며 예술공간 이아를 나섰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