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 문화로 꽃 피우다-바깥물질의 확장 2

1985년 고 강예길 할머니 인터뷰 '블라디보스토크 물질' 확인…다시마 작업
일본 출향 1·5세대, 2·5세대 해녀…'현역' 벗어나 당시 생활사 자료로 가치

"그 때는 몰랐다. 그렇게 먼 곳인지.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고종사촌을 따라 나섰는데 가서 보니 소련이라고 했다. 사람들도 무섭고 바다도 무섭고…"

제주해녀의 바깥물질을 얘기할 때 종종 등장하는 지역이 있다. 중국 다렌·칭다오와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다. 과거 연구자들이 '다녀왔다'는 기록은 지나다 들은 얘기라기보다 사실에 근거한다.

고 오성찬 작가의 취재용 수첩과 「오성찬이 만난 20세기 제주사람들」(2000년·도서출판 반석)에 고 강예길 할머니의 인터뷰에는 멀리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다시마 작업을 했던 사정이 나온다. 1985년 봄 행원에서 만난 강 할머니는 88세의 나이에도 비교적 온전하게 당시를 기억했다. 강 할머니는 객주였던 고종 사촌에게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24살이던 1922년과 이듬해 1923년 두 차례나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고 했다. 배를 타고 다시 기차를 타고 몇 밤을 길에서 보냈는가를 잊어버릴 즈음 낯선 바다에 닿았다.

△ '문화'통한 해석 확대 중요

제주해녀를 살피는 기준이 달라지고 있다.

예를 들어 제주해녀의 바깥물질만 해도 1895년 시작해 1930년대 초중반 절정에 이른 뒤 해방시기까지 활동이 약해졌다는 것이 중론이지만 최근에는 다른 해석들이 보태지고 있다.

'바깥물질'의 기준이 다양해진 때문이다. 제주에서 물질을 하다 건너갔는지, 아니면 물질을 목적으로 제주를 떠난 것인지 등 새로운 접근 통로가 생기는가 하면 부산 등 국내로 이동했다 다시 일본 등으로 옮겨가는 양상까지 다양하다.

'해녀'라는 단어를 단순하게 경제·산업적인 내용으로 해석하는 데서 벗어난 결과물들이다.

일본에 건너간 사연들도 보다 다양해졌다. 1세대 해녀들 중 상당수는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 등을 피해 일본행을 선택했다. 이들 중 돌아오지 않고 일본에 남은 해녀들은 계속해 물질을 하거나 다른 일을 찾아 바다를 떠났다.

2세대 해녀들은 광복을 전후해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을 선택한 경우가 상당하다. 모집책을 중심으로 그룹을 이뤄 이동한 경우가 많다. 사실 이 경우는 1970년대 이후 이동을 살피는 것이 용이하다.

광복을 기준으로 1960년대에도 해녀들은 일본에 건너갔다. 자유로운 왕래가 불가능했던 시기였다. 대부분 밀항으로 바다를 건넌 까닭에 그들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어떤 경로로 어떤 일을 했는지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1.5세대, 그리고 2.5세대로 일본으로 바깥물질을 나간 제주해녀들을 다시 살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가난해서" 버리고 다시 배운 물질

박화춘 할머니.

히가시오사카시 기시다도니시에서 만난 박화춘 할머니(89)는 1955년 일본으로 밀항했다. "너무도 가난해서"가 이유였다. 성산 출신인 박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물질을 배웠고 언니와 부산으로 바깥물질을 나갔다. 이후 뭍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과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말에 밀항을 선택했다고 했다. 당시 돈으로 1만2000원을 냈다.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일본행 배를 탄 16명이 숨을 죽이고 바다를 건넜다. 처음에는 바다 근처에도 가지 않았지만 결국 물질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등록이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거야. 죽으나 사나 배운 게 이 것(물질)뿐이니. 38명이 같이 일을 했는데 그 중에 두 번째로 돈을 많이 벌었지. 결혼을 하고 나니 남편(구좌 출신)이 그만하라고 성화를 해서 그만뒀지".

오사카에서 기차와 버스로 12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아타미까지 가서 작업을 했다. 그 때는 그렇게라도 돈을 벌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다고 손사래를 쳤다.

임순애 할머니.

한때 제주 타운이라 불렸지만 지금은 사라진 '이카이노' 근처에서 임순애 할머니(76)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시장에서 잔일을 도와 생활하는 할머니가 '직접 채취했다'는 미역을 나눠 주더라는 말 하나로 시작해 이 점포 저 점포 묻고 물어 집에서 요양 중인 임 할머니를 찾았다. 임 할머니는 1964년 일본으로 건너왔다. 김녕에서 태어난 임 할머니는 집안 빚을 갚기 위해 먼저 일본에 간 어머니를 따라 왔다. 18살 어린 나이였다. 일을 구하지 못해 속을 태우던 차에 일본에 건너와 물질을 하던 사촌고모(임송주)에게 일을 배웠다. 고치현, 우와지마 등에서 작업을 했다. 당시 제일 나이가 어려 주변에서 이런 저런 도움을 받았지만 일을 그만 둔 뒤에는 같이 작업하던 해녀들과 별다른 교류를 하지 못했다고 했다.

다른 일에 비해 현금을 일찍 손에 쥘 수 있었지만 임 할머니의 인생에서 24살까지 6년의 시간만큼 힘든 시기는 없었다. 사촌고모는 이후 몸이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물질을 했다. 먼저 일본에 건너간 남편이 현지에서 재가를 하면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흑백사진 속의 임 할머니는 해맑은 미소를 지닌 10대지만 지금은 '니시하라 준아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고된 몸을 일으킨다.

두 할머니의 기억은 '바다'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박 할머니의 기억은 일제 강점기부터 6·25전쟁까지 아우른다. 임 할머니의 삶은 광복 이후 격동기와 일본에 건너간 재일제주인의 흔적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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