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 문화로 꽃 피우다3-바깥물질의 확장 Ⅱ

물질 하기 위해 보다 살아남기 위한 선택 많아
일제강점기·4·3·6·전쟁 등 가난 대물림이 내몰아
"힘들어도 환금성 좋은 일" 제주 기억 남아있어

출향 해녀들의 이주는 생애사(史)적 관점에서 읽는다. 몇 살에 어디까지 갔고, 어떻게 갔으며, 무엇을 했다. 그리고 돌아왔거나 그 곳에 남았다는 흐름이다. '왜'라는 질문에는 하나 같이 '돈을 벌기 위해'라는 답이 나온다. 여기서 '왜'의 의미는 다중적이다. 적어도 무엇을 하러 갔는지, 무엇 때문에 갔는 지로 나뉜다. 예를 들어 출가 물질 경험이 있는 해녀 10명에게 물으면 최소 3가지 이상의 이유가 나온다. 그 배경에는 당시 제주를 둘러싼 사회 환경이 있고, 또 이로 인한 공동체 문화의 변화도 읽어야 한다.

△ 물질할 바다를 찾아

제주 해녀들이 한반도의 다른 지역과 일본 등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동기는 1876년 한일간 병자수호 조약 체결이 있다. 조약을 이유로 일본이 한반도까지 어업 영역을 확대하면서 바다밭을 잃은 해녀들이 제주를 떠났다는 해석이다. 당시 기록을 보면 1880년대 초부터 일본 잠수기 어선이 제주를 비롯한 한반도 해역에서 작업을 한다.

일본 잠수기 어업의 우리나라 진출은 1879년 4월 야마구치현 출신의 요시무라 요조(吉村?三)가 잠수기 한 대를 가지고 제주도 부근에서 조업을 한 것에서 시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후 야마구치현과 나가사키현 출신 잠수기업자가 제주도를 근거지로 남해안에서 조업했다.(김영·양등자 '바다를 건넌 조선인 해녀, 1988) 잠수기 어업은 잠수복을 착용하고 수중에서 공기를 배급받으며 작업하는 방식으로 오랫동안 물속에서 작업이 가능해 어장은 곧 황폐화 됐다. 1885년 나가사키현 기록은 당시 조선인의 전복 채취를 일본 잠수기 어선의 10분의 1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한다.

잠수기선의 남획으로 전복 등 수확물이 줄어들자 제주가 아닌 다른 바다에 눈을 돌리게 된다. 제주해녀의 한반도 출가 물질은 1895년 경상도를 시작으로 이후 강원도,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함경도 등 한반도 전역을 아우르게 됐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칭다오·다렌,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영역을 확장한다.

△ 이동 성격에 대한 해석 분분

지금까지의 조사를 정리하면 제주해녀의 일본 진출은 크게 △물질을 하기 위해 △다른 일을 찾을 수 없어서 △현지에서 배워서 로 구분할 수 있다.

'물질을 한다' 역시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 등의 성격으로 비자발적인 이동을 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로 구분할 수 있다. 다른 일을 찾을 수 없어서, 또 현지에서 배워 물질을 하는 사정 이면에는 '환급성'이 있다.

제주 해녀의 일본 진출은 1903년 미야케지마를 시작으로 하여 주로 미에현에 진출했다. 미에현 해녀들이 조선에서 작업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제주 해녀에 비해 작업능률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반대로 미에현에서 제주 해녀를 수입하는 상황이 됐다. 마스다 이치지는 「제주도해녀」(1976·마스다 이치지 지리논문집 중)를 통해 '제주해녀가 미에현의 이세 해녀 등 일본 해녀들에 비해 노동임금은 저렴하면서도 능률이 비교적 높고, 추위에 강하다는 이유로 일본 진출 해녀의 수가 매년 증가해 일제 강점기인 1932년 즈음에는 1600명이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진출 해녀는 당시 일본 어업업자나 우리나라 선주 등과 고용관계를 맺는 형태로 이동했다. 배에 의한 일본으로의 진출은 쓰시마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오사카를 경유했다.

제주 해녀의 일본 진출 중단은 능력 문제 보다는 외교적 요인이 더 컸다. 광복 이후 제주 해녀의 일본 출입이 통제된다. 일부 또는 암행적으로 일본에 진출하는 사례는 있었다. 일본에 정착한 제주 출신 수산업자가 제주해녀를 모집해 일본 아마들과 더불어 나잠업을 행하는 형태였다.

김영·양징자의 「바다를 건넌 조선인 해녀」(海を 渡った 朝鮮人 海女)(新宿書房, 1988)를 보면 일반적으로 제주도 해녀의 일본 진출은 1895년을 그 기점으로 하여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시기는 1895~1945년 사이 자유 이민시대로 한반도 내는 물론이고 일본과 중국, 러시아 등으로 진출이 용이했다. 1945~1960년 지역적 이민시대에는 국경이 있어 외국으로 이민이 제한됐고  '밀항'을 통한 이동이 많았다. 1970년부터 현재까지는 나름 '합법적'절차를 거친다.

△먹고 살기 위한 노력 결과

시기는 달라도 바다를 건넌 공통적인 이유로는 '가난'이 꼽힌다. 먹고 살기 위해 바다를 건넜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그 중에서도 빨리 현금을 쥘 수 있는 일을 고르다 보니 물질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등을 떠미는 각자 다른 이유도 있다. 2015년 만난 1세대 '마지막' 해녀 중 한 명인 홍석랑 할머니(당시 92세)는 광복 직전인 1944년 20살 나이에 국민 징용령에 의한 '모집'형식으로 일본에 끌려갔다. 군수산업에 동원된 홍 할머니에게는 평생 '징용물질'이란 꼬리가 따라다녔다. 광복 이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할머니는 물질할 수 있는 바다를 찾아 계속 이동을 했다. 홍 할머니의 기억 속 제주는 "몸과 마음이 자유로웠던 곳"이다.

이번 현장 조사에서 만난 박화춘 할머니(89)는 1955년 밀항으로 일본에 왔다. 처음은 부산에서 물질을 했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물질이 목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입국증명을 받지 못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뭍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물질을 하려고 했지만 그나마 바다 사정이 좋은 대마도 등에는 갈 수가 없었다. 아타미까지 가서 물질을 하면서 웃은 날 보다 운 날이 더 많았다는 하소연이 그냥 들리지 않는다.

박 할머니의 제주에 대한 기억은 보다 다양하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 후 4·3, 그리고 6·25전쟁을 군사훈련으로 기억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학교 운동장에 불려 나와 제식훈련 따위를 했다. 4·3이 발발했을 때는 마을 사람들과 산으로 올라갔다 '빗개'역할을 했던 일을 떠올렸다. "남자 아이들은 앞에 서고 여자 아이들이 뒷 쪽에 섰어. 바스락 소리만 나도 덜덜 떨었는데…". 6·25전쟁 때는 너도 나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4·3 때까지는 어머니 혼자 바다 일을 하며 가족을 건사했지만 전쟁이 나고 부터는 박 할머니도 눈치껏 바다에 갔다. 그 바다를 떠나고 싶은 마음을 알 것만 같다.

임순애 할머니는 일본에서 물질을 배웠다. 1964년이면 전쟁 이후 배가 고팠던 시절이다. 임 할머니의 기억은 "내가 일본에 건너간 다음해 도쿄 올림픽이 열렸다"였다. 먹고 살 일이 있다는 말에 배를 탔다는 말을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빚을 갚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해야 했지만 기술 하나 없는 18살 소녀에게 일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일본에서 물질을 하는 사촌고모에게 물질을 배웠다.

비슷한 사연은 더 있다. 

홍석랑 할머니와 물질을 했다는 좌해월 할머니는 1978년 재혼을 하며 일본에 건너가 시어머니로부터 물질을 배웠다. 한림 월령 출신 김연희 해녀는 1989년 3월 결혼을 하면서 일본에 건너가 역시 시어머니에게 기술을 전수받았고, 애월 출신인 김정렬 해녀는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삶터를 옮긴 후 현지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들을 따라 다니며 물질을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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