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용희 (사)제주역사문화연구소장·논설위원

무술년이 가고 있다. 이제 한 손에 있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만큼이니 실감이 난다.

세밑에 오면 항상 드는 것이 아쉬움이다. 1년이라는 세월동안 노력을 하기는 한 것 같은데 막상 보니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노이무공(勞而無功)의 생각을 갖는다. 그리고 시간의 속도가 이렇게 빠를 수 있나 하는 느낌이다.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세밑에 오면 금방 체험한다.

세밑에 원도심 서문로 지역을 걷다가 낯선 광경 하나가 눈길을 붙잡았다. 익숙한 건물 하나에 가림막이 쳐져 있고 조만간 철거가 이뤄질 예정이라는 표지판이 한 켠에 세워져 있었다. 현대극장. 아니, 이렇게 불러서는 안 될 이름이다. 그 앞에 '구' 또는 '옛'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정확한 이름일 것이다.

내게 옛 현대극장에 대한 추억은 강렬한 게 하나 있다. 지난 1978년 시골의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한지 몇 달 후 학교에서 단체 영화관람을 했다. 그게 당시 현대극장이었다. 영화관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본 기억이다. 영화 제목이 '난중일기'인데 누가 주연이고 감독이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현대극장은 1980년대 후반까지 운영됐고 필자는 몇 차례 더 들락날락한 것 같지만 기억에 남는 영화는 없다.

옛 현대극장은 원도심에서 일제시대부터 70여년 이상의 세월을 지켜보면서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혼란기와 1970·1980년대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대를 모두 품고 있는 제주현대사와 함께한 공간이다.

일제시대 때 유랑극단 공연이 이곳에서 펼쳐지면 사람들은 가마니 등을 깔고 앉아 공연을 봤고 조일구락부로 이름을 단 이후에는 주요 관민단체의 회합의 장소였다. 이는 해방공간까지 이어졌다. 조일구락부, 구락부가 영어 클럽의 일본어 발음을 낸 것이니 이를 제대로 쓰면 조일클럽이다. 해방공간에서 이곳은 제주현대사에 큰 획을 그었던 단체들의 창단과 모임을 하는 활동중심지로 활용되면서 장소적 가치의 중요성도 덧붙여진다.

4·3의 도화선이 되는 지난 1947년 3·1절 기념집회 직전인 2월 23일 좌익세력 연합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제주도위원회 창립식이 열렸다. 9월 30일에는 우익단체인 대동청년단 제주도단부 결성식, 11월 2일에는 서북청년단 제주도본부 결성식도 이곳에서 열렸다. 한국전쟁이 마무리되고 이 공간은 제주극장, 현대극장 간판을 달았다가 내렸다.

몇 년 전부터 이 건물과 공간을 활용하자는 논의는 있었다. 제주도에서 매입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가격에 대한 이견으로 무산된 후 개인업자에게 매각됐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지만 이 역시 사실무근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기억은 공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과거의 사람들과 만나게 하고 동시대 사람들간에 공감을 형성한다. 그 공감으로 인해 같은 역사성을 느끼게 하며, 같은 공간에 살고 있다는 연대의식을 형성한다. 그래서 공감할 수 았는 공간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기억이 소멸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 기억만의 소멸이 아니라 그 공간과 관련된 모든 이들의 기억의 소멸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 한 시민의 방화로 숭례문이 불타는 것을 국민들은 TV로 지켜보며 허탈해 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하나의 옛 건축물이 불타는 것이 아니라 600년 우리 기억의 소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숭례문과 연륜이 비슷한 관덕정이 사라진다면 이는 우리 원도심 기억의 상실이요, 제주의 자취와 기억의 소멸이다.

건물적 가치는 장소적 가치와 함께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가로지르는 공감물이고 미래세대와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의 창이다.

우리는 원도심에 100년이 넘는 건축물을 가져 볼 수 있는 문화적 시민역량이 아직 부족한 것일까. 세밑에 드는 개인적 안타까움과 함께 사회적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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