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당당한 주체…민족·공동체 정신 흐름 중심으로
재조명 1월 독립운동가 유관순…제주는 부춘화 해녀
문맹퇴치·계몽운동·국내외 권리 수호 현장에 흔적 남아

"꽃이/피는 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이더군/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아주 잠깐이더군//…//꽃이/지는 건 쉬워도/잊는 건 한참 이더군/영영 한참 이더군"(최영미 '선운사에서'중)

시인은 사랑을 노래했다지만 읽은 나는 그랬다. 그날 그 때 한 껏 피어났던 그대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목소리를 내기까지가 힘들었을 뿐 그들을 잊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잊을 수가 없다. '대한 독립'이라는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밀지 않더라도 자신과 주변 등 지켜야 할 것에 대한 사명만큼은 누구보다 강하고 단단했던, 여성 그리고 독립운동의 현장에 있던 그대들이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이라 했던 저항시의 한 토막을 그들을 위해 풀어놓는다.

△ 사회적 약자, 역사의 강자

세상은 '사회적 약자'라 했다. '혐오'라는 불편한 단어를 얹고, 각종 강력범죄의 표적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불렀다. 평등을 외치지만 사회라는 틀 안에서 여성에게 적용하는 것들은 어지간한 균형 감각 없이는 이해하기 힘들 만큼 한쪽으로 쏠린다.

소리를 낸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실 다들 알고 있던 것들이다. '역사'라는 이름의 큰 수레를 굴리는 바퀴는 결단코 하나였던 적이 없다.

3·1운동은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여성'이란 이름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신여성'이 있었지만 그 보다 더 많은 수의 여성들이 가부장이란 그늘에서 고개를 숙였고, 노동력을 혹사당하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내 나라를 외치지 못했던 치욕스런 현실 앞에, 내 가족과 내 능력을 지키지 못하는 억울함에 당당히 나서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적 상황을 끌어내지 않더라도 제주 여성들의 주체성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 변화를 이끌었다.

△ 그대들이 있어 오늘이 있다

2019년에는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란 의미가 부여됐다. 그 처음을 여는 1월 독립운동가가 유관순 열사이고, 제주 출신의 1월 독립운동가로 해녀항일운동을 이끌었던 부춘화 해녀가 선정된 것은 우연이 아닌 운명이다.

유관순 열사는 1992년부터 지난해까지 선정됐던 314명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재선정한 이달의 독립운동가 중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전에는 1999년 3월의 독립운동가였다. 역사는 어쨌든 반복되고, 누군가 기억하는 것으로 의미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특별할 수밖에 없다.

부춘화 해녀의 1월의 제주 독립운동가 선정 역시 그 배경까지 들여다보면 의미심장하다.

지난해 제73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재인대통령은 "발굴하지 못하고 찾아내지 못한 독립운동의 역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특히 여성의 독립운동은 더 깊숙이 묻혀왔다"며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 사례로 제주해녀 항일운동과 평양 평원고무공장 여성노동자 강주룡의 항일운동을 꼽았다.

그리고 "묻혀진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의 완전한 발굴이야말로 또 하나의 광복의 완성이라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사실이 그러하다. 지난해 말까지 제주 독립유공자는 177명 중 여성은 고수선(1898~1989), 최정숙(1902~1977), 부춘화(1908~1995), 김옥련(1907~2005) 부덕량(1910~1939) 등 5명이 전부다. 제주 독립운동가들의 훈격은 애국장과 애족장에 편중돼 있다. 지역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절하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들의 노력과 역할을 폄하할 수는 없는 일이다.

△ 오늘을 만드는 단단한 밑돌

"…난 졸업장을 받지 않겠어. 일본 국가를 부르며 졸업장을 받는 것 보다 더 치욕적인 일은 없을 거야"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79명의 소녀 결사대를 이끌었던 고 최정숙 지사의 외침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문맹퇴치' 야학에서 시작해 계몽운동의 중심이던 제주여성청년회, 노동운동, 재일조선인단체까지 그들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직접 독립 의지를 글로 만들어 옮기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규탄 격문을 뿌리던 현장에 그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재판 기록이나 판결문의 한 줄로, 누군가는 직접 남긴 노트와 일기장으로 기억된다.

섬에 깊게 뿌리 내린 공동체 정신의 맥이 여성을 통해 제주 독립운동사(史)에 힘 있는 획이 됐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인증'이란 절차를 넘지 못한다 하더라도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나 형제, 남편을 보필하고 식사를 챙기며 군복을 만들었던 이들도 여성이었다.

국채보상을 위해 쌈짓돈을 꺼냈던 제주삼도리부인회와 함덕국채보상기성회도 있었다. 그들의 존재가 지금 제주를 만들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변화를 위한 현장에 서 있다. 변화는 저항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그러니 그들의 외침을, 노력에 제대로 눈을 맞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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