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실 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 회장·문학평론가·수필가·논설위원

어딜 외출하려면 지갑과 휴대전화기를 챙긴다. 지갑 속에는 신용카드, 자동차면허증, 약간의 현금이 들어있다. 지갑은 한자리에 두는데 가끔 발이 달렸는지 잘 찾지 못해 책상 위아래와 주변을 뒤질 때가 있다. 그러다 이 옷 저 옷의 호주머니를 뒤져 찾아내기도 한다. 

여성의 정장에는 호주머니가 거의 없다. 대신 옷과 잘 어울리는 핸드백에 필요한 물건을 넣어 다닌다. 의류전문가의 설명을 들어보면 유명 패션모델의 여성 옷에는 실제로 호주머니가 없다. 파리, 뉴욕, 이탈리아 등지의 유명한 패션거리를 활보하는 멋진 의상에 더러 호주머니가 붙어있지만 모두 장식용이라 한다.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호주머니에 물건을 넣으면 아름다운 옷의 모양이 훼손되고 호주머니 부분은 이내 늘어져 보기가 싫어진다. 

영국의 수필가 A.G. 가디너(Gardiner 1865~1946)의 작품 <호주머니와 물건들>이 있다. 이야기의 발단은 어떤 부인의 소송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가게에 들어가 돈과 귀중품이 든 손가방을 놓아두고 물건에 신경 쓴다. 잠시 한눈판 사이 손가방이 도난당한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상점 주인과 다투게 된다. 결국 법적으로 손해배상 청구를 제기한다.

재판정의 배심원들은 모두 남성이다. 여성들의 호주머니에 대한 기피증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원고에게 동정하지 않는다. 배심원들의 답신서에는 '이게 모두 호주머니 기피증에서 발달한 피해'라고 작성되어 있다. 판사가 최종 판결한다. "원고가 스스로 조심하지 않고 재난을 자청한 일이다. 원고의 소(訴)를 기각한다"며 판사봉으로 땅땅땅 세 번 두들기는 것으로 끝낸다. 

이렇듯 동서고금을 통해, 특히 젊은 여성들의 정장은 호주머니를 두고 목숨(?)을 거는 듯하다. 옷의 유행과 관계없이 거의 맹목적인 듯싶다. 추운 겨울에도 짧은 치마에 스타킹을 신고 외출한다.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마치 운명의 손길인 양 유유낙낙한다. 이렇게 아름다움과 멋을 위해서라면 고집을 꺾지 않는다.

오래전 겨울이다. 추리닝을 세탁한 상태라 옆에 걸려있는 집사람의 치마를 걸치고 밖에 있는 장독대에서 김치를 꺼내왔다. 잠시 잠깐이었는데, 아랫도리는 냉동실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려 생기침에 재채기까지 나왔다.

그런데 요즘 젊은 여성들의 패션에 대단한 변화가 왔다. 이는 어느 나라 인종과 상관없이 정장 대신 몸에 딱 붙는 바지를 입고 캐주얼한 신발을 신고 다닌다.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바지가 체형에 딱 붙는다. 바지에는 호주머니가 달려있는데, 뒷호주머니에는 휴대전화기가 꽂혀 있다. 허벅지와 무릎을 드러내기 위해 멀쩡한 옷을 찢고 헐게까지 한다. 이게 제4차 혁명시대의 유행이고 멋이란다.

82년 여름, 아내는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한 달간 독일에 왔다. 아내가 한국에서 가지고 온 바지 뒷호주머니에 지갑을 넣고, 우리 부부는 관광지를 찾아다니며 구경하고 있었다. 많은 인파가 몰려있는 켈른(K?ln) 시내를 구경하면서 아내의 독일방문 기념물로 소형 카메라를 선물하기로 했다. 하지만 돈이 든 지갑을 이곳 도심 한가운데서 소매치기당했다는 사실을 계산대에서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모른 채 우리 부부는 서너 곳의 카메라 가게를 돌아다녔던 것이다. 카메라 가게 밖으로 나와 괜스레 뒷호주머니만 탓하며 마음을 달랬다.

어릴 때의 호주머니에는 동전. 구슬. 딱지가 들어 있었고 학창시절에는 학생증과 교통카드가 들어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양복바지 허리에 붙어있는 작은 비상주머니, 더군다나 혁대가 막아주고 있어 든든하기까지 했다. 그 속엔 꼬깃꼬깃한 희망이 들어 있었다.

바지에 붙어 있는 호주머니에 두 손을 넣어 본다. 휴지뿐이다. 어쩐지 쓸쓸해진다. 그래도 나의 호주머니 속에는 따뜻한 추억이 소복하게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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